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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색과 성찰의 섬, 청산도

이름

최봉환

날짜

2005-01-18 [12:10]

조회

추천

지친 영혼을 포근히 안아주는 섬.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한 해 동안 쌓였던 모든 감정을 받아주고 아늑한 산자락은 조용한 사색으로 안내한다. 영화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이 울려퍼졌던 곳, 흥겨우면서도 한편으론 구슬픈 노랫가락에 맞춰 한 해의 기억을 정리해본다.

한 해가 저문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다급함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던 한 해의 기억이 어지럽고 어수선한 까닭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정리가 필요한 때다. 추억으로 남겨두거나 쭉정이처럼 버리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올해의 마무리는 고독을 닮은 섬이 좋겠다. 한숨과 후회 섞인 도시에서 호흡해 봐야 또 다른 번잡함만 낳을 뿐이다. 홀로 떠 있는 섬은 사람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고독을 불러낸다. 고독이야말로 추억과 쭉정이를 걸러주는 사색의 바탕이 된다. 깊은 사색의 땅으로 발을 내딛는다.

자동차와 사람을 잔뜩 실은 페리가 완도항을 미끄러지듯 벗어난다. 땅끝마을 해남을 지나 완도까지 오는 긴 여정의 피곤함은 배 위에 오르는 순간 사라진다. 항구에서 멀어질수록 모든 감정이 녹아 있는 뭍과의 이별이 실감난다. 뱃머리는 청산도를 향한다.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섬, 구슬픈 노랫가락이 섬을 감싸고 흐른다. 50여 분을 달리자 청산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네 개의 유인도와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다섯 배 정도. 1,50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대부분이 노인으로 젊은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딛고 선 두 개의 등대 사이로 배는 빨려들듯 청산항에 닿는다.

육지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바다 속의 땅이 솟아오른 걸까? 청산도라는 섬은 이별과 추락 또는 외톨이로 태어난 존재다.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런 고독함이 동병상련을 느끼듯 우리의 정서를 어루만져준다. 청산도에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겠다.

청산도는 그 자체로 위로다. 푸를 청(靑), 뫼 산(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푸른 섬’. 특히 봄에는 청보리밭이 지천이고 감청색 바다와 푸른 산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푸름은 유난히 매서운 파도와 바람을 헤치고 억겁의 세월을 버텨낸 끈기와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지역에서 10년이면 자랄 소나무는 이곳에선 30년이 넘어야 비슷한 크기가 된다. 비바람을 받아내며 안으로 안으로 강해지고 성숙해지는 소나무는 청산도의 상징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먹이사슬에 끼인 현대인에게 성찰을 일깨워주는 푸름이다.

청산도엔 시간을 거스르는 낯선 풍경이 많다. 돌과 바람이 많아 척박한 땅에는 옛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논, 밭 그리고 집의 경계로 삼을 뿐 아니라 방풍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돌담과 슬레이트, 양철을 인 집 등이 지금도 그들의 생활 근간을 받치고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청산도는 시간을 단단히 부여잡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기에 청산도에서 보내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낸 1년보다 더 길게만 느껴진다. 1년처럼 긴 며칠의 여유 속에서 한 해를 차례차례 곱씹을 수 있다.

▒ 바닷가 일몰에 한숨을 털다

바다는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모든 것을 풀어놓게 한다. 드넓은 바다의 가슴이 다 안아줄 것만 같다. 청산도에서 바다의 베풂이 두드러진 곳은 지리해수욕장과 신흥해수욕장 그리고 갯바위 위다. 섬의 남서쪽에 자리한 지리해수욕장은 옴폭 들어간 만의 아늑한 수영장이자 최고의 일몰 장소로 꼽힌다. 약 1.2km의 백사장을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처얼썩’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에 한여름의 웃음소리가 묻어 나온다. 즐거웠던 추억이 한순간 스쳐 지나간다. 오후 6시쯤, 소나무 아래, 수평선 아래로 또는 산 아래로 해가 떨어진다. 바다 위 하늘을 향해 쏟았던 좌절을 담은 해가 떨어진다. 가슴이 더없이 후련하다.
신흥리에 있는 신흥해수욕장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물이 다 빠졌을 땐 2km나 되는 갯벌이 드러난다. 바지락을 캐는 할머니와 한쪽 방파제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할아버지 모습이 평화로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언제, 어디에서나 갯바위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건 청산도가 주는 여유다. 물고기를 낚는 짜릿함보다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안겨 준다. 분주히 미끼를 끼우고 입질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다.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만 귓가에 부서진다. 고즈넉함에 빠져들 땐 흥겨운 장단이라도 맞추듯 물고기가 입질을 해줘 기분이 좋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낚시를 드리우는 일이 지겹지 않다. 12월은 학꽁치, 1월엔 돔이 몰려든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갯바위에 걸터앉아 꽁치를 잡아 올리는 섬 주민들이 그렇게 넉넉해 보일 수 없다. 여유를 가지고 삶을 즐기는 사람들, 과연 나는 얼마나 즐기며 살고 있는가?

▒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산자락에서 사색

섬의 주봉인 매봉산, 대봉산, 보적산은 해발 400m가 채 안 되는 낮은 산들. 낮은 산과 더 낮은 산이 능선을 이뤄 중심에 오목한 분지를 형성하고 바깥쪽 능선은 바다로 이어져 기암절벽을 이룬다.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고 사색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건 몸을 폭 감싸는 아늑한 분지 때문이다. 1992년 화재로 벌거숭이가 된 보적산은 한겨울이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황폐한 자리에 어린 소나무, 야생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적산의 정상, 호랑이가 웅크린 모양의 범바위는 일출 명소다. 새벽부터 물살을 가르는 낚싯배 위로 해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하다. 청산도의 산과 들에서는 자연의 조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차갑고 습기 많은 북서풍이 땅을 축축하고 쌀쌀하게 적시면 비교적 따뜻한 북동풍이 불어와 섬을 평화롭게 한다. 돈, 사랑, 명예… 올 한 해 한쪽으로만 치우쳤던 것들도 서로 조화로워야 한다.

▒ ‘진도아리랑’의 선율에 한 해를 실어보낸다

자동차로 넉넉히 한 시간 정도면 청산도 유람을 마칠 수 있다. 최근 포장공사가 끝나 일주도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산, 바다, 마을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으헤 아리랑 응응응…’ 진도 아리랑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당리 황톳길은 청산도에서 가장 유명한 길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가 ‘진도아리랑’을 주고받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당리재는 청산항에서 약 5분 거리로 1m 정도의 돌담을 끼고 황톳길이 350m나 이어져 있다.

황톳길로 들어서면 ‘진도아리랑’의 노랫가락이 선연히 들려온다. 현실의 슬픔과 한스러움이 담겨 있는 ‘아리랑’, 세마치장단이 가슴을 흔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상처와 아픔을 주는 현실 때문이다. 가슴속으로 뜨겁게 ‘진도아리랑’을 불러본다. 신기루처럼 지난 일이 사라질 것만 같다.

[Information]

숙박
민박과 모텔을 이용해야 한다. 모텔은 대부분 청산항에 있어 편리하지만 섬의 정취를 느끼려면 민박이 좋다. 민박집 대부분이 바다와 산을 끼고 있어 포근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개보수를 거쳐 더 좋아졌다. 10개의 민박집이 있는데 그중 청산항과 10분 거리인 ‘앞개민박’(061-552-8703)은 아늑한 만에 자리해 마음을 정리하는 데 더없이 좋다.

식당
청산도의 별미는 삼치회와 바다장어탕. 삼치회는 입에서 부서지며 녹는 육질의 고소함이 으뜸. 장어탕은 된장을 넣어 구수하면서 바다장어의 부드러움과 야채의 신선함이 조화롭다. 식당은 모두 청산항 주변에 모여 있다. ‘자연식당’(061-552-8863)은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을 사용해 향토색이 진하다. 매운탕 2만원, 장어탕 2만원, 삼치회 3만원.

교통
목포에 도착해 땅끝 마을 해남을 지나 완도항에서 고속 페리를 타야 한다. 동절기(9월 16일 ∼3월 20일)에 청산을 출발하는 페리는 07:00, 09:50, 13:00, 16:00에 있고 완도를 출발하는 페리는 08:00, 11:20, 14:00, 17:55에 있다. 50분이면 섬에 도착한다. 가격은 1인 5800원, 승용차를 가지고 들어갈 때는 왕복 4만2000원이다. 자동차에 2명이 타고 있다면 1명은 개인 탑승권을 끊어야 한다. ● 061-552-9388

발췌 : 애니카 라이프 > 자동차로 떠나는 여행 > 주말 가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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