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의 힘
원구식 (시인, 월간 <현대시> 발행인)
1
헤르몬산은 해발 1만 척. 연중 눈이 녹지 않는다. 언저리는 울창한 숲을 이루어 요단강의 수원(水源)이 되고 있다. 그런 헤르몬산을 등지게 하고 헤롯왕의 아들 빌립이 만든 빌립카이자리아가 꽃핀 꽃밭처럼 펼쳐져 있다. 갈릴리 호수는 남쪽으로 100리쯤 떨어져 색지를 오려 붙인 듯 쪽빛으로 누워 있다. 밀은 남풍을 받아 이미 알이 다 찼다. 그는 왜 올해도 오지 않는가.
2
딱한 내 사정을 들어줄 그가 여기(다방) 오게 돼 있었다. 약속 시간을 10분이나 넘겼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30분이 지났다. 한 시간이 지났다. 할 수 없이 자리를 뜨면서도 또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다음 또 기회가 있겠지 하고 나는 나에게 타이른다. 그러나 마음에 몹시 걸린다. 아무렴, 그렇다 하더라도 전화 한 통 해줄 수는 있었겠는데 말야.
―김춘수, 「메시아」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틈이 나는 대로 《현대문학》에서 발간한 『김춘수 시전집』(2004)을 읽었다. 이 전집은 총25권의 시집들과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발표작들을 묶은 1,150쪽의 방대한 책이다. 나는 이 전집 속에서 김춘수 선생의 시세계를 압축하여 한 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내가 찾은 시 한 편이 바로 이 시이다.
이 시는 1993년에 발간된 시집 『서서 잠자는 숲』에 실려 있다. 선생은 30여 년 간 줄기차게 '무의미시'를 고집하시다가 이 시집을 통해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신다.
내가 이 시를 주목하는 이유는 '진술' 때문이다. 이 시의 앞 부분은 풍경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헤르몬산과 갈릴리 호수가 눈에 보일 듯 선명하다. 밀에 대한 세부 묘사는 문자 그대로 알이 다 찼다. 그 다음에 메시아는 왜 오지 않느냐는 시적 진술이 나온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다. 다방에서 오지 않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초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전화 한 통 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독백의 진술이 나온다. 진술이 바로 이 시를 완성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 쓰기 방법은 언어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이미지스트들에게는 금기인, 좀더 정확히 말해 실패한 시 쓰기에 해당된다. 진술을 통해 자기 감정이 촌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한다. 고향이 그립다 말하지 말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는 풍경을 묘사하여 보여주라 한다. 진술보다는 묘사가 상위개념이라 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시인들이 철저히 묘사만으로 시를 쓰고 있다.
언뜻 김춘수 선생은 무의미시로 인하여 묘사를 위주로 하는 시인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니다. 김춘수 선생의 시 중에서 알려지거나 성공한 시편들은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와 같이 대부분 진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묘사란 한 마디로 말해 언어로 회화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시에서 묘사를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시 안에 시적 화자가 없다는 뜻이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것이고, 진술이 없다는 것은 시에 자신의 주장이나 철학이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의미가 없는, 그림만 있는 무의미시로 발전하게 된다. 30여 년 간 무의미시를 고집해 온 김춘수 선생은 그 끝에서 절망하고 의미의 세계로 돌아온다.
나는 오랫동안 시 쪽에 서 있었다. 극단적으로 시를 고집하기도 했다. 내 나름의 순수시를 말함인데 나는 그것을 무의미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용단장」이란 시를 30년에 걸쳐 완성하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시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시를 위한 나의 미학은 일단 마침표가 찍히게 되었다.
―김춘수, 『서서 잠자는 숲』(민음사, 1993) 후기 중에서
선생의 시 「메시아」는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쓰여진 시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묘사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지 글을 쓰는 방법이 아니다. 쉬르리얼리즘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이 미술에서는 성공했지만, 시에서는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묘사는 또한 치명적으로 시에서 리듬을 감소시킨다. 이미지즘의 폐해인 것이다. 시는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을 달리해 왔다. 초창기의 시인들은 시를 노래했고, 그 다음엔 시를 썼고, 그 다음엔 묘사를 했고, 요즘엔 철학을 한다. 현대시의 문법과도 같았던 이미지즘과 그 창작법도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김춘수 선생은 의미의 세계로 오시면서 초기의 관념시와 같이 끊임없이 진술을 하신다. 진술을 하기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김춘수 선생의 시를 빌어 말하려 하는 바이다. 진술하라. 자기 목소리가 없는 시는, 자기주장이 없는 시는, 자기 철학이 없는 시는, 무엇보다 자기 감정이 없는 시는 죽은 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7,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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