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다 / 송종규
자동차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폭우가 쏟아졌다 수억만 개 무
늬를 그리며 부서지는 물방울들, 멀지 않은 곳에서 쿵쾅거리며 번쩍
이는, 그리하여 하늘과 모든 어둠의 배경 위에 날카로운 금을 그으
며 천둥과 우레는 X선처럼 내 속을 투영해 갔다
생이 곤두박질치는 듯한 극단의 순간, 구겨지고 분열되고 폭발하
면서 나는 작동되지 않는 기계처럼 흘러내렸다 물방울의 일부인 듯,
진흙의 일부인 듯
햇살이 물방울 속에 반짝이는 집을 짓고 나서 몇 분쯤, 세상은 보
송하게 마른다 젖어있던 몸 안의 기억들이 김을 피워 올리면서 마르
고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아주 가벼운 공기들이 온 몸 가득 차 오른다
기억이란 한 찰나, 분절된 시간의 단면이 드러낸 결들
먼 바다로 가기 위해, 다시
안개와 폭우와 햇살 속으로 달려간다 가파른 몇 개의 斷崖가
또 다시 성큼
몸 안에 들어서고 고장 난 기계처럼 나는, 흘러내릴 것이다
어느 피안에 닿으려고,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 <심상>으로 등단
시집<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고요한 입술>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녹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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