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인은 아침의 흰 우유를 마신다 / 장석주
이건 무슨 환각일까 환각 같은 현실일까
가을의 날들이 내 앞에 있고 병든
내가 검은 전화 앞에 있을 때
나의 애인은 없을까 없는 것처럼 있는 걸까
아침의 흰 우유를 마시며 젖은 날개를 털며
안개 낀 아침의 달려가는 자전거 바퀴살을 바라보며
희망의 철학과 기다림의 자유를 가르치는
오래된 책을 펴들고 앉던 나의 애인은 없다
이건 무슨 착각일까 누군들 개들의 시절에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욕망의 어두운 나날에
갇혀 보낸다 눈물로 책상 모서리까지 적시며
애인을 기다리며 사람은 병들면 더욱
약해지는 법이다 저 침묵하는 검은 전화
너머 창밖을 보라 흐린 가을날의 풍경 속을
달려가는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 지금
나의 애인은 어디로 달려가는 것일까
마른 풀들의 갈피갈피에 피곤하고 지친 하오의
여윈 햇빛들이 오래고 긴 잠에 들기 위하여
힘없이 넘어지는데 바람이 불고
처참하게 가을은 내장까지 드러내고 마는데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사귀들은 외로움을 서걱거리는데
나는 아직 한 끼의 식사도 못했다 겨우 일어나
산발한 머리로 창 밖 흐린 풍경만 응시했을 뿐
세상에 내가 태어나 한 일은 그것뿐
호주머니에 숨은 먼지들이 잘 안다 개들의 시절
애인을 기다리는 일의 눈물겨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나의 애인은 여전히
아침의 흰 우유를 마시고 젖은 날개를 털고
있을까 나의 울며 견디는 나날의 슬픔을
시린 뼈 시린 살 속에 기다림으로 타는 작은 불의 숨결을
알고 있을까 지금 없는 나의 애인은
나를 불러내기 위하여 검은 전화 앞으로 가고 있을까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시부문 신인상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가작
고려원 편집장 역임, 청하 편집발행인 역임
현재 동덕여대 등에서 강의
시집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어둠에 비친다>,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등
평론집 <풍경의 탄생>, <들뢰즈, 카프카,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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