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나이 / 박춘석
저를 다 써버려 거죽만 남은 노인이 거울의 표지처럼 앉아 있어요. 80 평생을 비춰놓은 거울의 얼굴이죠. 노인의 거울이 노인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어린 날에서 늙은 날을 다 담고도 더 늙을 날, 미래로 거울이 나이를 먹어 가고 있어요. 거울 속에 흰 머리가 자라고 있어요. 거울 밖에서 거울 안으로 노인을 옮겨가는 중이죠.
공기 속에 풀어 놓았던 사랑한다는 말이 실연의 흔적으로 내 얼굴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어요. 지도로 구획된 구간 구간들이 선명해져 가고 있어요. 날의 나이 해의 나이가 거울 속에서 완성되고 있죠. 나의 계절의 나이는 여름쯤 되었을까요?
거울의 나이는 극복될 수 없는 극지죠. 발소리가 소거된 얼굴들의 창고지만 순간의 얼굴만 살고 있죠. 거울이 너무 많은 얼굴을 복사해 두어 다 읽을 수가 없어요. 거울의 생태는 흐름에 있다는 말과 가둠에 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죠. 흐르다가 멈춘 곳이 거울우주의 지름이죠.
태양을 기다리는 건 얼굴을 기다리는 일이죠. 내일은 내가 꽃과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는 날이죠. 거울이 햇살 쪽과 슬픔 쪽 양 방향을 기웃거리고 있네요.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02년 《시안》을 통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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