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저 은행나무
양문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지 만 10년이 되었습니다. 불혹에 접어들어 낙향한 이후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니다 지천명에 이르러 비로소 쉴 곳을 찾았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천태산 여여산방입니다.
그동안 나는 고향인 학산 새재의 농막생활을 비롯해 천마산 중화사 요사채, 천태산 영국사 뒷방, 영동의 본가 등을 두루 거쳐서 천태산 자락에 똬리를 틀게 된 것이지요. 여기 오기까지 난관도 많았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이 컸습니다. 중화사 소임을 맡았던 장산 스님, 현구 스님, 그리고 영국사 진성 스님, 성진 스님, 특히 부모님과 안식구의 배려가 없었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하였지요.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있었지요. 대학에 하루 빨리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마음을 쓴 것부터 시작해 출판사 일,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은 내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시간강사로 일주일 내내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긍긍하며 몸과 마음이 지치던 그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지요. 하지만 이 모두가 하나의 통과의례라 생각하고 인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젠 모든 것을 비워두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지금 여기의 처소를 여여산방(如如山房)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내 것이 아닌 자리에 욕심 부리지 않고, 남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며, 타인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양식으로 공부하고 명상하며 글 쓰는 것이 최선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공부방을 꾸려나갈까 생각해 봅니다. 그게 시 공부이든 생명평화와 관련된 공부이든 자연과 뭇 생명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나눔의 정신을 궁구할 것입니다.
지난해 봄 천태산 은행나무를 찾았는데요.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 나무는 왜 저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일까. 영국사 뒷방에 기거할 때 하루에도 수십 차례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말입니다.
은행나무는 큰 그늘을 내려주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른 봄이라 잎을 달고 있진 않았지만 나무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는데요.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안식을 얻은 것처럼 평온하게 보였습니다. 나도 은행나무 큰 그늘 속에서 행복했습니다.
하늘 받든 은행나무는 안녕하신지?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다시 천태산 영국동(寧國洞)으로 든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
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이다
해고노동자, 날품팔이, 농사꾼
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
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
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이란 사람 모다 모였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
비울 것 없어 고요한
저 은행나무 그늘이 되고 싶은 게지
하늘을 닮아가는 아버지도
밭둑가 구름이 드리운 그늘에
잠시, 고단한 몸 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늘 속에서 쉬는,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천태산 은행나무 아직도 법음 중이다
—양문규, 「그늘 속에는」 전문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에 속하는 나무로, 살아있는 화석으로 종종 언급됩니다. 연관종이 없는 특별한 종으로 은행나무문에 속하는 유일한 종이니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천태산 은행나무를 비롯한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도 각기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고들 말합니다. 은행나무와 관련된 전설도 다양하게 구전되고 있는데요. 그중 천태산 은행나무에 대한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은행나무가 울면 나라가 위기에 처한다는 속설이 담겨 있지요.
몇 년 전 MBC TV, 「화제집중」프로그램에서 이 나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요. 난 인터뷰에서 은행나무의 울음을 ‘생명의 소리’라 말하였습니다. 국난이나 환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함을 알려 주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귀함과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소리, 즉 생명의 소리”라고요.
한 생명이 만 생명을 살리는 나무, 한 생명이 뭇 생명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나무, 그런 나무가 바로 천태산 은행나무입니다. 단지 그 품과 키가 큰 것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터, 천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픈 삶들을 어루만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눈시울이 붉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천태산 은행나무처럼 꿈과 희망, 안식의 그늘을 내려주는 사람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키가 큰 만큼 더 많은 것을 송두리째 자신의 그늘에 가두고 살아가려고만 하니, 그런 사회 현실이 참으로 슬프기만 합니다.
이제는 절도 자연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젊은 날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산사에 올랐을 때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감로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문명에 파괴되지 않은 자연 풍광이며, 형제자매처럼 따뜻하게 반겨주는 스님, 스님은 차를 내어주셨고, 늦은 시간이면 방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요. 절 만큼은 세월을 비껴가리라 믿었는데…….
영국사도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은행나무만 꿋꿋하게 제 자리에서 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요 몇 년 사이 영국사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 버렸습니다. 절을 찾는 노보살님을 비롯해 산행길에 지친 등산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던 요사채가 헐려버렸고요. 그 자리 한 귀퉁이에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컨테이너 박스가 앉아 있답니다. 요사채는 영국사를 상징하는 또 다른 건물이었는데요. 마치 어느 여염집 살림을 보는 것처럼 정겨운 모습을 안고 있었답니다. 사랑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 요사채 대신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는 곳에 덩치 큰 건물이 들어섰는데요. 그 건물은 일반 사람들이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고 있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절에서 설치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의 염불소리 때문에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절집 처마에 매달려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는 쇠붕어 그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할 때는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어디 영국사뿐인가요. 가는 절마다 너도 나도 앰프를 틀어놓고 절이라고, 절하라고 소리칩니다.
천태산에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비울 것 없어 고요한/저 은행나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해고노동자, 날품팔이, 농사꾼/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들에게 감로수를 내려줍니다.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입니다.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저 은행나무……
천태산에는 영국사가 없습니다. 산과 산 사이 물 따라 바람 따라 영국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 자리 천 년 은행나무가 안과 밖 경계를 지우며, 가고 오는 사람들에게 참배를 합니다. 구름과 구름 사이 희미한, 영국사에서 빠져나온 부처가 무주공산 떠돌다 지상으로 돌아와 행불(杏佛)이 되었나 봅니다. 수천수만 나뭇가지 비집어 광대한 허공 속으로 귀를 내고 천수천안 관음을 펼칩니다.
—『시에』2009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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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