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열린 문에 대하여 / 이성렬
전나무 그늘에 가려진 그 청동의 문은
대리석 건물 귀퉁이에 서 있네
녹회색 반달 손잡이를 목처럼 드리우고
어스름한 어깨를 숙인 채로
낯선 대지의 기척에 귀 기울이는
그 안쪽은 갈 수 없는 나라
영원의 입구에 이르는 미로에
오르간 소리는 무덤처럼 잠들어 있지
잎사귀들이 부산하게 속삭이는 길 위에
가벼운 표정으로 그림자들은 오가며
정오의 종소리만이 생각에 잠겨
시간은 어두운 방에서 치마를 끌며 거니네
어둠은 두려운 것, 그것은
세상의 첫 스케치이니
다만, 연극이 시작할 무렵 설레이며
자주색 커튼이 올라감을 예비할 뿐
소리와 빛과 꽃가루가 알몸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가
보이지 않는 책장에 쌓여가지만
누구도 그 분류법을 알 수가 없네
그러나 문 밖에서 서성이며 행복하지
시간의 검은 갈퀴가 언제 목덜미를
채어갈지 모르는 이 운명도 기쁘네
문은 반만 닫혀 있으니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이며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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