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스프리]
담을 넘어간 울음
마경덕
골목에는 많은 것들이 살고 있다. 골목을 서성이던 어둠과 담을 넘어간 고양이울음, 덕지덕지 허리춤에 광고지를 붙인 전봇대가 밤늦은 골목을 지키고 있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슬금슬금 나를 향해 걸어오던 소리들, 냄비 긁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쌀 씻는 소리, 설거지 소리, 아이 우는 소리… 그날 품었던 소리를 그대로 꺼내놓던 골목,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고추 모가 두 잎의 귀를 닫고 잠든 밤, 막 줄을 잡고 담을 타기 시작한 호박잎 위로 달빛이 한 대접이나 쏟아지곤 하였다. 담벼락에 묵은 시래기가 걸려있던 집, 기저귀가 펄럭이던 집, 보라나팔꽃이 피던 집, 문짝이 떨어져나간 집, 그 집에 살던 둥글거나 모난 소리들이 녹슨 문고리를 붙잡고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마를 맞대던 처마는 사라지고 지붕이 높아진 집들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문소리조차 닫아 건 집들은 정적에 싸여있다. 언제부턴가 골목은 말수가 줄었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던 노인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폐지를 담은 고물 유모차가 털털거리며 지나가고 앞집 측백나무에 모였던 참새 떼가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면, 사라진 소리들은 내 귀에 감겨 가슴으로 번져간다.
1. 전봇대
전봇대는 그 자리에 서있다. 아랫도리에 개를 묶고 자전거를 묶던 전봇대는 전선에 친친 묶여있다. 한 번도 골목을 빠져나간 적 없는 저 전봇대, 참새들의 수다를 받아 걸던 전선을 타고 천리에서 날아든 정보가 허공을 건너간다. 집집으로 송전되는 희로애락, 붙박이 전봇대는 동네의 소식을 훤히 꿴다. 허공에 길이 트여 수많은 사연들이 몰려오고 몰려간다. 애완견을 찾는 광고지와 과외생을 구하는 광고지를 닷새 만에 치매노인의 가출 소식으로 바꿔 달기도 했다. 하늘을 붙잡고 우뚝 서있는 늙은 골리앗, 비바람을 견뎌내는 철골에 여러 겹의 힘줄이 달려있다. 푸른 동맥을 돌고 돌아 찌릿찌릿 손끝을 물고 세상으로 퍼져 가는 빛과 소리들, 달궈진 힘이 가슴을 관통해도 고요한 전봇대. 바람이 어깨를 툭툭 치며, 종일 전봇대를 드나든다. 아이들은 게임에 미쳐있고 수다스런 아낙들 노래방과 찜질방에 몰려가서 볕 좋은 날에도 심심한 골목, 창문 위 둥지에서 담 밖으로 쫓겨난 비둘기부부 울음과 취객의 오줌발에 진저리치던 전봇대, 한 자리에 오래 묶여 있었다. 오늘밤은 가로등마저 끄고 어둠속에서 웅웅- 혼자 운다.
2. 가구들
봄이 오면 골목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짐을 챙겨 떠나는 사람과 짐을 싸들고 찾아오는 발길로 부산하다. 집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떠나야 한다. 골목에는 버려진 장롱과 책상이 후줄근히 봄비를 맞고 있다. 버려진 것들은 대개 귀퉁이가 헐거나 아귀가 헐거워서 덜컹거린다. 비에 퉁퉁 불은 가구들은 사지를 뻗고 길바닥에 드러눕는다. 산 나무들은 파릇하게 생기가 오르는데, 저것들은 오래전에 뿌리가 잘린 것들이다. 생의 울타리를 넘어버린 것들이다. 죽어 다시 태어나 한 생을 살다가 다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또 어디로 끌려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듯 봄비는 살아있는 것들의 봄비이다. 치매노인도, 가출한 손자도 돌아오지 않는 골목에 종일 봄비의 입술이 촉촉하다.
3. 향기
창밖으로 지나가는 하늘이 얼굴을 바꾸듯 봄이 오면 골목의 표정도 달라진다. 김치찌개 냄새가 날아오르던 골목으로 향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일어서는 것이다. 짙은 꽃냄새를 따라가면 그곳에 만개한 사월이 있었다. 골목을 나는 새들의 날갯짓도 힘이 차서 사월은 생기발랄, 자욱하게 꽃안개를 피우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라일락 향기를 안개로 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숨소리는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나무들의 숨소리. 그것들의 들숨 날숨을 따라 골목이 한자나 길어지곤 하였다. 라일락의 체취가 사라지면 뒷산이 마을까지 내려왔다. 골목은 아카시아 향기에 젖어 다시 들뜨고, 나는 담을 넘어온 향기에 창문을 닫지 못했다. 잡목으로 우거진 산이 가장 맑은 숨소리를 내는 것은 이때였다.
4. 미니스커트
아무 데나 침을 뱉고 껌을 씹는 열아홉 살이 골목에 산다. 손수건만한 치마로 허벅지를 엉덩이로 가리고 슬리퍼를 끌고 학교에 간다. 그 아이가 학교에 가는지, 춤을 추러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늘 집을 나선다. 허벅지에 새겨진 나비 한 마리가 아이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건 말건, 열아홉은 멋대로 명랑하다. 전화요금이 밀리건 말건, 아이는 휴대폰을 들고 낄낄 친구를 붙들고 산다. 치마는 갈수록 짧아져 다리는 길어지고 불안은 늘어나도 열아홉은 무작정 행복하다. 할머니가 도라지를 다듬는 동안 전화요금은 늘어나고 어머니가 생선칼로 둥근 나무도마를 내려치는 동안 또 전화요금이 새끼를 친다. 시장통에서 좌판으로 늙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쉽게 팽개치는 아이지만 미니스커트와 휴대폰만은 절대로 던지지 않는다. 그날이 와도 끄떡없다. 여전히 미니스커트를 걸치고 담을 넘는다.
5. 새소리의 값
이 골목에서 가장 고가로 팔리는 것은 새소리였다. 아침 일찍 소리를 팔러 나온 텃새소리에 골목은 아직 살만하였다. 작은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새들의 언어는 상큼하고 앙증맞았다. 언제 들어도 적당한 목소리, 한꺼번에 떠들어도 귀가 즐거웠다. 저들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귀가 어두워 그저 내 식으로 풀어 읽었다. 앞집에 우거진 향나무를 참새 떼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무는 참새똥으로 얼룩이 졌다. 한 마리가 날아오르면 우르르 따라 올랐다. 촐랑촐랑, 새들은 가벼웠다. 전선에 앉았다가 고새를 못 참고 또 향나무로 포르르 날아왔다. 향나무는 새총으로 새들을 높이 쏘아 올리려 Y자 가지를 자꾸 늘려 나갔다. 아무리 봐도 저 듬직한 향나무가 새들의 본가였다.
아침에 눈 맞추고 나왔던 나무가 저녁에 와보니 간곳이 없었다. 새로 이사 온 주인이 창에 그늘이 진다고 베어냈단다. 세상에! 향나무는 오래전부터 참새들의 소유였다. 집주인은 까맣게 몰랐지만 새소리의 값을 후히 쳐주던 골목도 이미 그러리라 믿고 있었다. 새들의 울음도 사라진 나무를 찾아 날아갔다. 새소리의 값은 그만 헐값에 담을 넘어갔다. 새를 놓쳐버린 골목의 시세가 폭락했다.
6. 장마
느닷없는 폭우에 골목의 길이 사라졌다. 하수구는 삼켰던 물을 게워내고 빗물은 낮은 데로 몸을 사렸다. 물은 스크럼을 짜고 달려들었다. 담요, 모래주머니가 문턱을 넘는 물의 대가리를 막아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삽날로 물의 몸통을 찍을 수는 없었다. 좁은 골목으로 몰려든 물살은 너무 빨랐다. 물뱀이다! 나는 소리쳤다. 골목이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골목에 숨어 살던 물뱀에게 모두 물렸다. 문턱을 넘어 온 물뱀 사건 이후 또 한 차례 골목의 시세는 하락했다.
7. 발소리
골목은 갖가지 소리 중에도 발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120 -15호, 김씨 할머니, 유모차 소리, 120 -17호 오씨 할머니 털신 끄는 소리, 120 - 18호 조씨 아저씨 샌들 소리, 120-16호 내 슬리퍼 소리, 남편의 구두 소리, 큰딸의 하이힐 소리, 둘째의 단화 소리, 막내 운동화 소리… 귀 밝은 녀석은 체중과 발걸음을 다 외우고 있다. 낯선 걸음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골목은 바짝 들러붙어 꼬치꼬치 묻는다. 어디서 왔나요? 누굴 만나러 왔나요? 무슨 일로 왔나요? 수상한 발소리를 만나면 “빨리 문을 닫으세요.” 하고 소리친다. 지난여름 경고를 무시한 옆집은 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담을 넘어온 사내는 대문으로 버젓이 걸어나갔다. 골목을 의지하고 살던 집들은 부쩍 신경이 예민해져서 대낮에도 마음을 닫아건다.
움푹 파인 발자국이 골목을 걸어간다. 막 포장을 끝낸 질척한 골목을 지나간, 발을 잃어버린 오래된 발자국, 딱딱한 콘크리트 발자국이 쉬지 않고 골목을 걸어간다. 구두가 운동화를 껴안고 큰 발이 작은 발을 업고 박성희 미용실, 월풀 빨래방 현대슈퍼를 돌아 나간다. 사라진 발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빈 발자국을 따라가는 내가 아프다. 어느 날 찾아 온 사랑은 나를 딛고 가버렸다. 버거운 영혼이 가벼운 영혼을 밟고 저벅저벅 앞만 보고 가버렸다.
누군가 길에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골목은 발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전문
8. 도둑고양이
오전 내내 뒤꼍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쩐지 암고양이 같다는 예감. 간절하게 짝을 찾는 소리이거나 배가 고파서 우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잠시 끊어졌다 이어지며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 울음, 나는 직감적으로 산통이라는 걸 느꼈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는 안다. 그 처절한, 숨이 턱턱, 멎을 것 같은 그 해산의 고통을 어찌 잊으랴. 이 세상에 위대하지 않은 엄마는 없다. 고양이는 첫 출산을 겪는 것일까. 울음이 신음에 가깝다. 몸을 떨며 발톱으로 바닥을 긁는 모습이 떠오른다. 고통은 오롯이 암컷의 몫이다. 찬 바닥에서 혼자 몸을 푸는 떠돌이 고양이, 아무도 네게 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네 불안한 식욕이 골목을 서성이며 쓰레기봉투를 찢을 것이다. 고양이 울음이 담을 넘어 내 품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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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