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편지 릴레이 / 복효근 시인이 보내 온 편지
지리산에 시를 묻다
- 마경덕 시인께
복 효 근
무사히 잘 돌아가셨는지요? 서울서 남원까지 그 먼 거리를 오시게 하고 또 남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그 밤에 가시게 해놓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뜻밖의 내방에 어떻게 맞이해야할지 몰라 손님맞이에 서툴렀던 것 다 헤아려주시겠지요. 촌부의 시골 생활이란 뻔한 것이어서 보여드릴 것도 들려드릴 것도 마땅찮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빼어남을 대신 보여드리고 사람들이 그 안에 가꾸어온 역사와, 문화와 문학의 이런저런 모습을 조금이나마 마음에 담아 가시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사는 남원은 정유재란 때 온 군민이 목숨을 던져 고장을 지켜낸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 때 순국하신 일만 여 선열의 넋을 모신 만인의총 앞에서 우리는 만났지요.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있는 만복사지에 갔었지요. 그곳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패륜을 보고서 그토록 신앙해 마지않았던 유교전적들을 불태워버리고 스스로 스님이 되어 이 나라 산천을 떠돌았던 김시습의 문학혼이 배어있는 곳입니다.
「만복사저포기」는 함께 했던 처녀에 대한 사랑을 못 잊어 끝내 지리산에 숨어 그 행적을 감추었다는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지요. 「춘향전」에서 여자인 춘향이가 남자인 몽룡에게 보인 사랑과 정절은 어쩌면 유교 사회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주제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의 사랑을 아녀자에 대한 남정네의 정절로 읽을 수 있다면,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이념의 틀에서 보면 이단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강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져있는 유교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면서 남성중심의 일방적 정절관념에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도발적인 사고가 그 바탕을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따라서「춘향전」과 함께 「만복사저포기」가 나란히 그 옆자리에 놓일 때 남녀가, 여남이 평등한 온전한 사랑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자리에서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주절거린 듯도 싶습니다. 어쨌든, 상식과 시대를 뛰어넘는 매월당의 사고와 상상력의 흔적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여기서 사는 저에게 매운 자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광한루원에 갔었지요. 연못에 잉어 떼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날 이곳에 사는 저도 한 번도 올라보지 못했던 광한루마루를 마 시인님 덕분에 올라보았습니다. 귀한 손님 오셨다고 관계자가 누마루를 개방해주셨지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을 보면 어사가 출도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그 곳에 서서 저는 젊으나 젊은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그리고 민중을 수탈하던 부도덕한 권력을 호쾌하게 꾸짖는 정의로운 사나이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시간이 허락되어 <혼불 문학관>과 「흥부전」의 고장인 남원의 인월, 그리고 판소리 가왕 송흥록과 명창 박초월의 생가까지 방문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함께 갔던 섬진강 유장한 물길을 기억하시는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꼭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때 맛없는 아이스크림의 기억 말고 시인의 가슴에 남은 그 무엇이 있기를 바랍니다. 덕유산과 지리산 서쪽을 감아 흐르면서 하많은 생명들에게 젖줄을 대고 있는 강이랍니다. 가슴으로 살고 가슴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과는 오래오래 말없이 한 나절이라도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지켜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리산 천은사를 구경하고 함께 산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횡단도로를 이리구불 저리구불 차를 타고 넘어오신 것 기억하시지요? 그게 지리산이었습니다.
엊그제도 천왕봉을 다녀왔고 다다음 주에도 갑니다만, 지리산은 저에게 어떤 물리적인 공간이기에 앞서 높고 서늘한 정신적인 영역으로 느껴집니다.
정령치 마루에 올라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시종 조용하게 지리산 연봉들을 보고 계셨던 모습이 선연합니다.
저 동쪽에 남명 조식 선생이 있고 이 쪽에 매천 황현 선생이 계신답니다. 세속의 부귀영화가 세상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산청의 깊은 골짜기를 오히려 드맑은 세상의 중심으로 만드신 분, 남명 조식. 그리고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준 매천 황현 선생은 늘 몽매한 제 영혼에 등불을 비춰준답니다. 시인이 도달해야할 영혼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시인에게 맡겨진 정신사적 책무를 떠올리게 하는 스승이랍니다.
제가 사는 남원은 그렇게 역사적인, 문화적인, 문학적인 토양이 두터운 곳이지요. ‘그런데도 복시인은 여태 그 모양이냐?’ 고 물으시는 것 같아 낯이 더워집니다. 아무리 토양이 기름져도 씨앗이 부실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다만 이 순후한 자연 속에 살면서 선인들의 준열한 가르침을 배우면서 소박하게 살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순일한 삶이 반드시 이 지리산 골짜기에만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세속의 한복판에서도 그런 삶을 추구하는 분이 많지요.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선주인 나는 짐이었”다고 스스로를 낮추며, 겸허하게 짐을 벗는 마음으로, 버리고 비우는 마음으로 늘 구도하는 자세로 시를 쓰시는 마 선생님이 그런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이 이 편지를 선생님께 쓰는 이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잘것없는 촌부를 찾아주셔서 큰 격려가 되었음을 알려드리고, 함께 했던 시간을 의미 있게 기억하고자 졸필로 몇 자 적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제가 서있는 지리산 모퉁이에 쑥부쟁이 피어나고 풀벌레 소리 가득합니다.
이 계절도 선생님의 시와 삶이 그윽히 깊어가기를 빕니다.
2006년 초가을
지리산 바래봉 아래서 복효근
- 현대시 (2006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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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