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 눈이 내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태어나 난생 처음 밟아본 금강산에 눈이 내렸다. “눈이 너무 많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습네다.” 북측 안내원의 말에 순백의 금강산을 눈 앞에 두고도 입구에서 발을 멈춰 멀거니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되 개골산(皆骨山)이 아니다. 개골산. 겨울이면 나무와 바위가 앙상한 뼈처럼 드러난다고 해 붙은 금강산의 별칭. 두터운 누비솜옷을 입은 금강산엔 걸맞지 않다. 그래서 금강산엔 다섯번째 숨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설봉산(雪蓬山)이다.
신선과 선녀들이 내려와 놀다가곤 했다는 금강산은 온갖 설화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제는 인간도 철사난간을 놓아 신선의 높이까지 기어올라간다. 그러나 이번처럼 눈이 대차게 내리면 1~2ｍ씩 쌓인 눈은 철사난간을 흔적도 없이 파묻어버린다. 설봉산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내려다보는 것만큼은 신들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다시 선녀들만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발을 돌려 신계사로 향했다. 구룡연 초입, 신계사로 향하는 소나무 숲길엔 늘어진 눈들이 아치를 이룬다. 가느다란 가지위에 염치없게도 5~6㎝ 가까이 올라앉은 눈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는 예고없이 후두둑 눈세례를 뿌린다.
신계사 안마당에 들어선다. 눈이불을 덮은 널따란 절터, 소나무 병풍에 둘러싸인 정겨운 절 한채. 단청 아래 서서 고개를 들자 저 너머 머리가 하얗게 센 집선연봉과 채하봉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산도, 나무도, 절도 하얗다. 천지만 겨우 분간하라고 옅은 윤곽만 남겨놓은 채 모두 흰색으로 칠해버린 한편의 수묵담채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붓모양이라 ‘문필봉’이라 이름지어진 작은 봉우리가 붓끝에 흰 먹을 담뿍 묻힌채 다소곳이 서 있다.
신라 법흥왕때 세워진 신계사는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도 12채의 건물이 남아있었으나 모두 불타버렸다. 지난해 말에서야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대웅보전 한채만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살짝 얼어붙은 신계천 위에도 어김없이 눈은 내려앉았다. 울퉁불퉁한 개천가의 바위들도 솜털같은 눈이 감싸고 지나가니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융단처럼 뻗어나간다. 원래 신계천엔 유난히 연어가 많았다. 전설에 따르면 사찰 앞에서의 살생과 비린내를 막고자 주지승인 보운조사가 동해 용왕과 담판지어 연어의 출입을 금했다고 한다. ‘보운조사의 불심이 영험하고 신비하다’하여 신계사(新溪寺)는 이후 신계사(神溪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시끌벅적한 만물상도 순백의 세상 앞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네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선녀가 뛰노는 아래 나뭇꾼이 산을 타고, 꼬부랑 할머니가 엉금엉금 바위를 기어올라가고, 토끼와 거북이가 몇천년이 지나도록 경주를 벌이고, ‘으르렁’ 포효하는 호랑이, 뛰노는 사슴, 그 옆에 고행하는 석가모니….
보는 이의 천품(天稟)에 따라 볼만큼 보고, 알만큼 알 뿐이라는 만물상.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한 후 필요없게 된 만물의 초안(草案)을 공중에 휙 던졌더니, 그 종이가 너훌너훌 한반도 동해 바닷가에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 솟아오른 것이 바로 만물상이었단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히니 그 앞에는 남도 북도 없었다. 금강산 근처 마을에 사는 북측 꼬마들은 눈사람 굴리느라 까르르 웃는다. 남측 관광객도 눈덩이를 뭉쳐 얼음사탕처럼 조금씩 깨물어 먹어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길. 휘청거릴땐 북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준다.
뾰죽뾰죽 삐쭉삐쭉, 찔릴듯 깎아지른 금강산이지만 갓내린 눈이 봉우리를 덮으니 한 품에 안을 수 있을 듯 푸근하다. 그러나 눈덮힌 설봉산은 새하얀 옷을 더럽히기 싫은지 그저 바라만 보라 한다. 산세의 빼어남에 부드러움을 더했으니 누가 감히 범접하랴.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 중에서도 갓 내린 눈으로 새하얀 설봉산의 운치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 금강산의 백미(白美)이다.
▶금강산 여행 길잡이
금강산 관광은 만물상 코스(왕복 3시간30분)와 구룡연 코스(목란관~상팔담·4시간), 해금강 코스(온정리~삼일포~해금강·3시간30분), 동석동 코스(영춘대~목란관·7시간)가 있다. 매일 오후 4시30분과 오후 6시에는 온정각에서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이 펼쳐진다. 금강산 온천(오후 1~9시)에선 실내탕뿐 아니라 노천탕에서 비로봉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도 있다.
금강산에 가려면 남북의 출입관리연락사무소(CIQ)를 통과해야 하므로 신원조회를 위해 마감 15일 전에 예약을 마쳐야 한다. 우리나라가 아니다. 휴대폰과 노트북, 비디오 카메라 등 각종 기기들의 반입이 금지돼 있다. 세관 통과나 버스 이동시의 사진 촬영 역시 엄격히 금지된다. 금강산 관광 중 각 코스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은 무료이나 구룡연 관폭정과 금강문에 있는 화장실은 2~4달러의 요금을 내야 한다.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는 달러와 원화가 모두 사용이 가능하다.
철도청·현대아산은 열차를 타고 다녀오는 1박3일짜리 눈꽃열차 상품(월·금요일 출발)을 내놨다. 오후 8시40분 서울역에서 출발, 동해역에서 관광버스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거쳐 다음날 아침에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관광을 마친 후 오후 4시 금강산을 출발해 열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5시46분 서울역으로 돌아온다. 어른 16만6천9백원, 노인 15만7천7백원, 어린이 13만3천원. 침대 객차를 이용할 경우 5만원을 추가한다. 예약 비타민여행사(02)736－9111
〈금강산|글·사진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
등록일 : 2005-01-31 ●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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