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항의 공무도하가 외 4편 / 하주자
길이 끝나는 곳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돌아서 가렴
끝내거나,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은
언제나 비경悲景이다
모래뻘에 찍힌 백수광부의 발자국이
비틀비틀 바다로 향하고 있다
그의 술병 속에서 들리는 소리
공후 뜯는 소리인지 비파 소리인지
입 속에 모래가 가득 씹힌다고 생각했을 때
파도가 몽돌을 씻기고 천천히 돌아섰다
공무도하, 이제 나는 공후인이 아닌데
공무도하, 자꾸 공후에 가락을 넣으라는 건지
광부의 뒷모습은 비경悲景 속에서 점점이 섬이다
물수제비처럼 떠가는 공후의 음율
그 음역 어디쯤에 나를 버리면
오천항은 또 하나의 길로 열리려나
섬은 여전히 섬으로 남아 있듯
공무도하, 더 이상 공후인은 없어
돌아 나오는 것만이 길이다
저 푸른 바다의 옆구리를 지나
낡은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천항 - 국도 7호선 종점
보름고망*
섭지등대에서 만난 칠월 장맛비
바다는 온통 검회색 이었다
요동치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밀려온 거친 물결이 물보라로 흩어졌다
숭숭 뚫린 검은 구멍 앞에서였다
건너편 초지 위에 서 있던 말 두 마리
비에 젖은 갈기를 훑고 가는 바람도
쌓아올린 검은 돌담 틈바구니에서
휘이잉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젖은 등줄기를 털어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무연할 수 있는 것
침묵처럼 서 있을 수 있는 것,
보름고망이라고 했다
들고 나는 바람의 길을 내주는
바람구멍을 담아 온 후 알았다
내가 곰솥 밑바닥처럼 달궈진 때마다
망아지처럼 뛰지 않았던 것은
가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곳으로 용암 끓던 시간이 잔물결로 흘러들었고
유황가스 같은 자책도 휘이잉 소리로 지나갔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그 보름고망이 있었다는 말이다
사는 것은 제 안에 울퉁불퉁한 구멍을 내고
스스로 공명하는 검은 현무암이 되는 일이었다
보름 고망 - 바람구멍, 제주도 방언
봄꽃
밤새 내린 봄눈에 희끗해진 자갈들
투둑 가르며 내려오는 오토바이 한 대
밤뫼아제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은 범아짐
출렁이는 목도리가 바람을 가르네
그녀의 얼굴이 그의 등에 푹 묻혀 지나는 순간
*질나쁜 연애의 제니스 조플린 머리카락이
언뜻 섞이곤 하지
빨간 스카프와 함께 헝클어진 금발을
야성의 음이 훝고 지난다네
우리 오라바니가 피는 담배 있잖혀 대낭구 그려진 거 말여
주섬주섬 속주머니를 뒤집어 꼬깃한 만 원을 꺼낼 때면
춘설을 헤치고 온 발그레해진 봄
그녀의 광대뼈에 햇살이 통통 튀어올라
여시골의 열아홉으로 돌아가지
점 십원 꽃놀음판에서
우리 오라바니 하고 매조 목청이라도 뽑는 날은
잔솔 밭에 휘영청 달이 뜨고 봄물 오른 목단꽃도 피어
개진해진 눈 밑에서 풋살구 시절이
부릉부릉 공회전을 일으킨다네
난장이었던 일흔의 굴곡도 반듯하게 펴주지
검은 고목에 매화 한 잎이 피고 있다네
*질나쁜 연애 - 문혜진의 시,
제니스 조플린 - 27살에 요절한 미국의 여성 록커
섣달, 삭힌 반데기는*
보름 동안 물에 담겨 있던 쌀에서 분홍 탕이 올라왔다. 겨울 추위를 맨 처음 밀고 올라오는 꽃순 같은 그 빛, 곯을수록 감칠맛을 낸다고 한다 더 깊이 들어가 제 안의 끈기를 빼내며 붉어지는 탕, 참 잘 곯았다 한다
곯은 시간을 민다
날 선 세상 더 곯은 아낙들이 둘러 앉아 넋두리를 섞어 산자 바탕을 미는 섣달, 잘 삭은 입담도 함께 밀려서 뜨끈한 구들장을 진다. 그믐께 달궈진 기름 속에서 순간 매화꽃으로 부풀어 오르는, 곯고, 찌고, 치댄 후 말린 날들
저 연하고 아삭한 감칠맛은 그래서 곯아도 썩지 않고 잘 삭은 시간의 골편이다.
*반데기: 한과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하는 작업으로 불린 찹쌀을 가루내어 쪄서 얇게 밀어 건조한 것, 반대기의 사투리
적막을 옮기다 - 공재 윤두서 자화상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탕건이 잘리더니 걸쳤던 관복 간 곳이 없고
오늘은 귀가 사라졌다
아니다, 버린 것이다
탕건을 자르고 옷을 벗자
낙숫물처럼 다른 골을 따라 흘렀는데
서로 다름이란 종내는
사립 밖 도랑에서 한물이다
대숲을 흔드는 비바람이 마음까지 쓸어가지는 못했으니
이제야 문 밖에 내리는
푸른 빗소리를 듣는다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두 눈을 부릅떠본다
형형하게 들어차는 저 빛, 저 눈빛들
사라진 것들 대신 가슴에 묻은 이들이 하나 둘 걸어온다
어떤 이는 피가 묻었고 어떤 이는 봉두난발이다, 달려갈 수 없으니
꼿꼿한 송곳으로 돋아 수사자 갈기처럼 뻗치는 수염
귀가 사라졌으므로 두려운가
종내는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질 목소리가
어두운 다락에서 좀이 슬어 퀘퀘한 묵은 종이로 남는 것이
매일 밤 거울 앞에서 쥐의 털을 고른다
빳빳해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내리그어야 할 선
쥐털을 묶는다
없으므로 더 또렷해지는 문 밖의 소리는
빛의 깊이를 꿰뚫어 줄 것인가
붓끝은 육척 몸뚱이가 갈기를 날리며 달려야 할
길을 열어 줄 것인가
깊은 밤 거울을 들여다보며
수염을 그린다
뼈 속까지 배여 든 적막을 옮긴다
심사평
제 아무리 가난하고 헐벗은 옷을 입은 시인일지라도, 그가 제일급의 시인이라면, 그의 눈에서는 백만촉광의 빛이 그 빛을 발하고, 그의 몸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시인의 체취가 배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시는 언어의 발효식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언어를 하나 하나 잘 다듬고, 그 어떤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오래 오래 삭혀두면, 시의 향기가 퍼져나오게 된다. 이 시의 향기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도 불구하고, 천 리, 만 리, 퍼져나가게 될 때, 우리는 그 시인을 대시인으로 미화하고 찬양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번 호에도 [오천항의 공무도하가] 외 9편을 보내온 하주자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슬픔의 비경을 마주한 [오천항의 공무도하가], 만고풍상의 시련 속에서도 누구에게나 ‘바람구멍’이 있어야 한다는 [보름고망], 흑백영화 속의 춘정을 노래한 [봄꽃}, 곯아도 썩지 않고 잘 삭은 한과와도 같은 삶을 노래한 [섣달, 삭힌 반대기는}, 대쪽같은 선비 정신을 노래한 [적막을 옮기다] 등을 살펴볼 때, 하주자 씨의 오랜 숙련과정의 세월이 삭혀져 있는 것이다. 부디 곯아도 썩지 않는 잘 발효된 시의 향기가 퍼져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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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