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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4-22 20:32:42, 조회 :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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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상반기<유심>신인상 당선작 / 권규미

2013년 상반기 《유심》신인상 당선작

희고 맑은 물소리의 뼈 / 권규미

   시간의 젖은 발들을 불러 북두의 별이 뜬 제 심연을 보여주는 소리의 뼈들, 희고 맑다

   천 년 녹음 두른 묵묵한 관음의 화신, 말에도 뼈가 있고 바람에도 뼈가 있으니 무릇 생명의 으뜸은 뼈대라고 서둘러 일필휘지

   어디서 굴러온지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생, 가망 없는 은총 속에 스스로 내몰린 듯 남루를 거울삼은 눈부신 저녁이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말 외로운 시인의 강짜라 여겼더니 부끄러워라 저 무량한 빛의 하염없는 하강을 쓸쓸히 베끼는 물소리 적막하다

   팔만 사천 꽃잎의 이마들이 동동동 희고 맑은, 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세계에 와서 제 몸 속에 차곡차곡 뼈를 쌓는 어리디어린 물소리를 본다

  산실에서
—아들에게

   나 한때 불후의 문장이었다 뜨겁고 단정한 겹문이었다 잠시, 강림하는 신의 통로였다 밀림으로 북소리 나르는 무지개였다 아득히 둥근 수평선을 업고 춤추는 원시부족을 인도하던 그때 나는 가여운 메시아였다 아침과 저녁이 겨울 징검다리처럼 뒤뚱거렸고 지하 수천 미터를 흘러 내게 와 닿는 북소리의 행진으로 발을 놓치고 손을 놓치고 한 척의 돛배처럼 둥둥 떠다녔었다 죽은 할머니와 죽은 아버지들이 안개처럼 하얗게 질려 아가야 아가야 소리치며 쫓아오고 직립의 나무들 초록날개를 펼쳐 흩어지는 별의 눈물을 받았다 진흙세상 몸으로 뚫고 연꽃 피었다고 견디는 데까지는 견디어 보자고 때때로 바람이 이마를 쓸다 가고 너와 나 필사의 한몸이었던 그 잠시 동안, 참으로 나는 불후의 문장이었다

  은행나무 아래 늙은 여자

   몇 만 걸음을 걸어 몸 하나에 도달했을까 나무는 한 채의 다정한 집이다 사방이 벽이고 사방이 문인 낯선 신전이다

   삼백 살은 되었을 법한 여자, 한 세상을 기차놀이하듯 지나왔을까, 몇 개의 간이역과 몇 개의 강, 들판을 가로질러 몇몇 계절에는 눈이 내리고 꽃이 피기도 한 멀고 먼 이방의 가여운 마을이다

   나무는 몇 줄 햇살처럼 애잔하고 성큼성큼 몇 계절을 순식간에 지나 화르르 물든 은행잎의 방이란 방들 고요하고 눈부시다

   하늘과 땅 사이 남루한 굴욕의 낮과 밤을 적막한 피륙의 꽃수처럼 무심히 짜 늘이며 심장의 박동을 꺼내 비춰보는 거울같이

   마른 연못의 물고기들이 시시각각 제 몸속으로 걸어드는 것처럼 몸 밖의 기관들을 다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금빛나무 아래

   풍경과 시간 사이 다시 맨발인 여자, 미물과 미물들 사이의 나무처럼 참 속절없는 경계인이다 어디를 가도 새로운 경계를 낳는

  다정한 그림자놀이

   죽음은 발명되지 않았어요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때때로 죽은 척 눈만 감을 뿐이죠 아침의 햇빛을 수의처럼 두르고 룰루랄라 무덤 속을 빠져 나오죠 하늘과 땅 사이를 콩닥콩닥 굴러 넘는 붉은꼬리여우처럼 태양은 자신의 심장마저도 믿지 않아요 죽음은 먼 옛날 삼엽충이나 매머드보다 먼저 우주를 다녀간 별의 종족이라고 누구나 믿었죠 문명은 늘 제 그림자에 가려 울기만 하는 갓난쟁이여서 무언가를 발명하기에는 슬픔이 턱없이 모자랐죠 와글와글 그릇 부딪는 소리와 젖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 먼지로 쌓이는 무덤 속 죽은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이에요 방부액에 담그지 않은 부장품처럼 문득 바스러지는 영혼을 처음엔 죽음이라 부를까 망설였어요 심장에서 스며 나와 발바닥에 매달린 서로서로의 죽음 위에 엔터키를 치고 스페이스바를 두드리면 무덤을 두른 희미한 그림자들이 심해어처럼 떠다녀요 죽음은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는데 달그락거리는 뼛조각을 끌며 달이 떠오르네요, 귀신처럼

  황금메기

   그대를 여기서 만나다니, 생산이 없으면 죽음이라는 말씀의 두릅들 마른 명태처럼 겹겹이 쌓인 나라

   살아 적빈을 자랑하더니 죽어 금물을 뒤집어썼네 그려 아무도 고백하지 않으니 스스로 고백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고

   자네 원래 자본주의라는 건가 어디 날 한번 가르쳐 봐 거짓말 해봐 꽃핀 적 없는 그 꽃못들에 대해 약속해봐

   죽어 천 년이 지나도 제 마음을 여의지 못하는 것들의 머리 위에 거짓말처럼, 다디단 거짓말처럼 촛불을 켜봐

   사유의 위독함은 식민지의 역사처럼 유폐되었고 진흙바닥에 꼬리를 펴 제 이름을 낳는 미물들처럼 빗방울 빗방울들의

   화담, 여기서 그대를 만나다니 물빛 부유한 호반의 숲 더군다나 황금의 세속 구차하고 가여운 만만세라니 참,

심사평

  아득하고 깊은 곳에서 온 진중한 시

   이번 신인상 공모에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당도했다. 작품들에서 오랜 기간 닦아온 흔적이 역력했으며 각각 개성적 미덕이 갖추어져 있었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십여 분의 응모작들을 놓고 토론을 했다.

심사위원들은 시적 감각과 상상력이 얼마나 활달한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따져 묻고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고자 했다. 한 편의 시의 활달함은 시의 품과 뜻이 얼마나 넓고 크고 그윽하고 간절한가, 또 신예로서 장차 그 시세계가 역동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미 만들어진 연상과 상상력을 깨뜨려 헐어버릴 수 있는 신예의 등장을 고대하며 심사를 진행했다.

   허전 씨의 시는 변환을 가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시적 대상물이 갖는 특질을 다른 대상물의 속성과 형세에 연결시키는 시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물들 사이의 이음과 맺음이 신선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정 변화의 과정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박미현 씨의 시편들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평상시의 일상에서 잔물결처럼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을 낯설게, 의외의 것으로 파악하는 시선이 색다를 데가 있었다. 삶의 이면과 삶을 이루는 안감을 들춰내는, 잠복된 것을 겉으로 끄집어내는 날카로운 안목이 좋았다. 그러나 시행의 전개에서 산문적 요소가 많다는 흠이 있었다. 느슨한 것을 바짝 줄이거나 조임으로써 시행이 탄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응모작들 중에서 권규미 씨의 작품들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것은 서로에게 행운이었다. 권규미 씨의 시에는 아득하고 깊은 곳에서 언어를 끌어다 쓰는 솜씨가 있었다. 물 쓰듯 펑펑 언어를 쓰면서도 예리한 눈매와 삶에 대한 면역이 그대로 전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썩 긴 동안 시를 써온 듯하지만, 언어 감각은 능란하지 않아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구석구석 재미도 있고, 알레고리도 있고, 아픈 곳도 드러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권규민 씨를 신인상 수상자로 흔쾌히 결정했다. 가까운 근처에서 터지는 일상의 새된 울림이 무딘 청각을 자극하면서 다시 음악이 되길 바란다. 심연을 파랑으로 표현하는 형상을 보여주기 바란다. 권규미 씨의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더 많은 정진을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 고형렬,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