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시론
이승훈
1 편지냐 시냐
나는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고 1996년 11월호 『문
학사상』에서 최동호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의 형식으로 시에
대한 최근의 내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후 이런 내 생각에 대
해서는 박상배 시인이 고맙게도 옹호를 해주었고, 김준호 교
수가 종합하는 입장에서 글을 써주었고, 그 글들은 시쓰기에
대한 내 사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 자리를 빌려 내
생각을 옹호해준 박상배 시인과 김준오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
한다. 하기야 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다고 시를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입장이 모호하다고 시를 잘 쓰는 것
도 아니다.
문제는 내 시론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에 있고, 그건 그들
의 자유이지만, 나도 나대로의 자유가 있다.〈시적인 것은 없
고 시도 없다〉는 내 주장이 문제이다. 어째서 이런 주장이 나
온 걸까? 취근에 내가 쓰는 시, 혹은 시라는 이름의 글이 노리
는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명제로 요약된
다.
사실 우리 시단에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가 너무 많고,
시라는 이름의 요물들이 너무 많고, 너무 많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 무덤이 너무 많으면, 그래서 무덤이 세
상을 가득 채우면, 세상은 무덤이 되고, 집과 무덤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덤은 없는 셈이다. 하기야 데리다는 「차
연」에서 무덤의 그리스 어원은 오이케이스(oikos)와 친척이라
고 말하고는, 이 오이코스에서 〈경제〉라는 말이 도출되었다
고 말한다.
나는 지금 무덤, 집, 경제에 대한 데리다의 사고를 해석하
고 사유하고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 시단엔, 아
니 시단이 아닌 곳에서도 너무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그것도
상투적인 유형의 시들이 발표되고, 그런 점에서 시가 사라진
게 아니가 하는 생각이고, 그런 시들에 내가 지쳤다는 점이
다. 쉽게 지치는 건 내 습관이고 병이다. 그러나 병이라고 걱
정할 필요는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문학사상』에서는 이런 소박한 의미로 시는 없다는 주장을
했고, 또 시든 문학이든 무슨 본질, 순수한 기원이 있다고
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 자체가 문학적인 텍스트도 없고,
그 자체가 시가 되는 텍스트도 없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문학
도 없고 시도 없다. 비시가 시이며 시가 비시이다. 시는 부정
을 먹고 산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다시 읽어보니까 의견 개진이 다소 미진한 구석도 있고 논
리적인 연결이 튀는 곳도 있다. 그러나 시는 시가 아니며 시
가 아닌 것이 시다. 시는 시를 부정한다. 시라고 하지만 과연
어디 시가 있는가? 이승훈 씨의 시는 독자가 읽을 때 시가 된
다. 말하자면 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한다. 그러나 다른
독자가 읽을 때도 그 시는 동일한 것인가? 시로서의 아이덴티
티, 고유한 본질, 자기 동일성은 한결같이 유지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승훈 씨의 시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시도
A라는 독자가 읽을 때와 B라는 독자가 읽을 때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 같은 것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고, 독자들 사이의
차이가 시라면, 시는 불확정적이고 전환적이고 끝없이 떠도
는, 이름없는 유령이고 차이이고 반복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믿어온 그럴싸한 시론,
특히 본질주의자들의 시론은 비판되어야 하며 얻어맞아야 한
다. 시를 찾는다는 것은 시를 포기하는 행위와 통한다. 시라
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고 반복이 있다. 시의
정체성, 기원, 목적은 없다. 기원이 비기원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1995년 12월 시집『밝은 방』을 낸 이후이다. 그
시집은 초판을 3천부 찍었지만 아직까지 재판을 내자는 소식
이 없다. 내 시의 대중성이 약한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초판
이라도 나가야 출판사에 체면이 설 것 같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신세다.
그건 그렇고 그해 겨울 내 시집을 읽고 제일 먼저 이만식
시인이 편지를 해주었고, 나는 그의 편지가 너무 고마워 그에
게 주는 편지형식으로 한 편의 시를 썼다. 이만식 시인의 편
지에는 내 시집 서문에 나오는 「그러나 고독하다는 것, 홀로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글을 패러디한 시와 안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겨울이지만 그때는 1995년 12월이고 지금은 1997년
1월이다. 그때도 감기에 시달렸지만 지금도 감기에 시달린다.
다영이(딸아이 이름)가 쓰던 작은 방으로 이사를 하고는 아
슬아슬하게 감기를 이겨온 내가 마침내 감기로 몸이 쑤시고
두통으로 고생을 하게 된 건 오늘 오전부터다. 어제 저녁엔
어머님 제사가 있었고, 나는 오후 내내 「문학사상」에 보낼
「풍자냐 패러디냐」라는 제목으로 우리 시의 문제점을 밝히는
원고를 썼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과로일 것이다. 술도 문제다. 돌아
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맥주를 평소보다 조금 더 마셨고,
무엇보다 오늘 아침(나는 이 글을 1월 18일 토요일 오후부터
쓰고 있다)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것도 모르고 준이(생후 18
개월)를 안고 아파트 앞 문방구를 다녀온 것이 감기를 도지게
했을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정신집중이 안되고 힘이 없고 머
리가 아프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머리가 아픈 상태에서 쓴다.
명색이 주간인 내가 원고 마감 날짜를 어기고 감기 탓만 할
수는 없어서이다.
이만식 시인은 내 시집 서문을 「그러나/쓴다는 것/계속
쓴다는 것은/과연 무엇인가?」라고 패러디했다. 나는 다시
내 글을 패러디한 그의 시를 패러디한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를 김재홍 교수가 주간으로 있는 시 계간지 『시와시학』에
발표했다. 일종의 시로 쓴 시론인 셈이다. 이런 시론시는 그
후에도 「윤호병 교수와의 대답」(『작가세계』,1996년 봄호),
「그리티포에추리?」(같은책),「시」(『문예중앙』,1966년 가
을호),「이 시대의 시쓰기」(『문학사상』, 1996년 11월호),
「이 글쓰기」(『현대시사상』,1966년 겨울호)등으로 전개된
다.
이만식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시는 제목이 「답장」으
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만식 시인에게〉라고 부제를 붙였다.
그렇다면 이 시의 독자는 누구인가? 편지는 읽을 사람이 정해
져 있고 , 내용도 사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답장이라
니? 이 시는 시인가, 편지인가? 시잡지에 실렸으므로 시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분명히 나는 읽을 사람을 밝혀놓았다. 그렇
다면 다른 독자들은 읽지 말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
냐하면 시잡지에 발효했기 때문이다. 시와 편지는 다른 형식
의 글쓰기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답장」이라는 시에서 나는
이 구별, 장르의 대립, 2항 대립성, 논리적 체계를 깨고, 해체
하고, 뭐가 뭔지 모르는 그런 경계를 노렸다.
시는 없고 차이와 반복만 있다면 이 시에서 나는 시와 편지
사이에 시가 있고, 시와 편지의 차이가 시이고, 또 편지와 시
사이에 편지가 있고, 편지와 시의 차이가 편지라는 이른바 사
이의 미학, 혹은 반미학을 노린 셈이다. 일종의 장르해체이
며, 광의로는 복합매체(intermedia),미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
다. 이런 작업은 지금도 계속된다.
2 거짓말을 하든지 죽든지
시론시에서 노래되는 것들은 현실도 아니고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답장」에서 나는 글쓰기, 시쓰기에 대한 나대로
의 사유를 노래했고, 시의 후반에서는 추신형식으로 답장을
쓰던 날의 내 근황을 다소 엄살을 섞어 노래했기 때문이다.
섞는다는 것, 혼합성, 복수성이 문제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비빔밥 시론」이라고 붙인다. 그렇게
붙일 수도 있고 붙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체질적으로 일
식이 마음에 들지만 일식은 비싸고, 이상하게 비빔밥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동안 난 연구실에서 잡채밥을 시켜 먹고 지
냈다. 원래는 아내가 도시락을 싸주기로 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한번도 도시락을 제대로 얻어먹은 적이 없고, 아내도
도시락 싸기가 귀찮을 것이고, 중국집에서 시켜 먹는 잡채밥
은 불결할 때가 많고 그래서 배탈로 고생을 한 것이 한두 번
이 아니다.
비빔밥은 잡채밥과 다르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비빔밥
을 맛있게 먹은건 지금은 앓고 계시지만, 젊은 시절 진주 처
가에 갔을 때, 장모님이 사주신 진주 비빔밥을 먹었을 때이
다. 비빔밥은 밥도 아니고 반찬도 아니고 밥과 반찬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재료들을 섞고, 비비고, 만드는 과정이
먹는 과정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비빔밥은 완성된 것도 아
니고 개방적이다. 모든 음식은, 김밥이나 주먹밥까지도, 완성
된 다음 먹는 것이지만 비빔밥은 내가, 당신이, 우리가 만들
며 먹는다. 만든 다음 먹는 것이 아니라 만들며 먹고,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고 먹는다.
독자의 참여를 요구하는 시라고 할까? 그리고 완성이 아니
라 만드는 과정, 생성이 중요하고, 그런 생성이 무슨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복수성, 파편의 세계로 뒹구는 것도 중요한 점
이다. 비빔밥에서는 안과 밖이 섞이고 밥과 반찬이 섞이고 당
신과 내가 섞이고 시와 비시가 섞인다. 섞임의 미학이다. 이
런 복수성의 세계는 이른바 2항 대립체계, 위계질서를 해체한
다는 점에 의미가 있고 무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다. 「답장」
에서 나는 시쓰기에 대한 나의 사고를,
그러나 쓴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이며 나를 나에게서 분리
시키고 두 개의 나를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종이 위에 나를
버리고 나는 하나의 차이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계속 쓴다는 것은 나를 계속 연기시키는
일입니다 종이 위에서 나는 계속 연기됩니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텍스트 밝은 방 속에 드
러나는 이 흔적!
그러나 쓴다는 것은 산다는 뜻입니다 글 속에만 내가 있으므
로 나는 내가 아니고 동시에 나입니다
오오 그러나 쓴다는 것은 내가 언어이며 타자라는 사실이고
타자의 타자가 나라는 사실이고 이 나는 무수히 (글을 쓰는
만큼)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사막입니다 계속 쓴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깨닫는 일이고 방랑이고(아무튼 시작도 끝도
없지요)
처럼 노래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시는 여기서 끝내야겠습
니다〉라고 썼다. 끝이라고? 〈깨닫는 일이고 방랑이고〉는 끝
이 아니라 휴식이고 연속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시를, 문장을 끝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끝은 연기된다. 이
런 내용이 노래된 다음 이 시는 형의 편지 고마웠다는 내용,
쓴다는 것은 업이라는 말, 지난밤엔 〈내일의 시〉동인들이 마
련한 출판기념회(인사동 누님 국수집)에서 술을 너무 마셔
하루종일 앓았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끝난다.
시론시라지만 다시 읽어보면 이 시에는 새 개의 코드가 들
어 있다. 하나는 이만식 시인의 시, 하나는 내가 쓴 시론, 하
나는 내 근황이다. 하나의 메시지 속에 두 개 이상의 코드가
들어 있는 것이 비빔밥과 비슷하고, 나는 이런 형식을 복수성
의 미학이라고 불러본다. 문제는 시론이다. 이 시에 나오는
시쓰기에 대한 생각은 그동안 내가 영향을 받았다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데리다의 철학에 빚을 지고 있다. 언젠가는 갚아
야 할 것이다. 데리다의 철학에 기댔다고 창피할 건 없지만
자랑할 것도 못 된다.
이런 형식, 이른바 복수성의 형식은 박상배 형에게 주는 편
지형식의 시 「기차를 향한 배고픔」(『현대시』, 1996년 1월
호),「끄노에 대한 단상」(『시와반시』, 1996년 봄호),「거짓
말을 하든지 죽든지」(『현대시학』,1996년 4월호)에도 나타
난다. 거짓말을 하든지 죽든지 이런 형식은 시라는 동일성 개
념을 해체하고 막힌 것을 뚫고 김수영 시인이 쾌활한 마음으
로 〈누이야 장하고나〉라고 외칠 때 같은 그런 세계를 지향한
다. 문제는 내 시론이다.
시를 쓸 때 고독이 문제지만(고독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때
와 지금이 다르지만) 나는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된다. 두 자아
는 시를 쓰는 나와 시 속의 나를 뜻한다. 시를 쓸 때 나는 하
나가 아니라 둘이며,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무수한 내가 존
재하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나는 담배를 피운
다〉고 시를 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다. 그렇다면 이 나, 시 속의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 밖의
나는 누구인가?
쓴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이다. 시를 쓸 때 나는 종이
위에 나를 버리고 혹은 버려지고, 나는 하나의 차이로 존재한
다. 시 속의 나는 시 밖의 나를 버릴 때 태어난다. 〈담배를 피
우는 나〉는 종이 위에만 존재하지만, 그런 점에서 시를 쓰는
나의 투사이며 버림이며 죽음이지만, 이 나는 나가 아니다.
이 나는, 지금 이 종이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나는 지금 시를
쓰는 나와 다르고, 따라서 두 자아 사이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없고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라는 글에서 나는 〈나는 없
다. 나는 시를 쓸 때, 말할 때 태어날 뿐이다〉고 말했다. 김준
오 교수는 이런 나의 진술을 〈모든 텍스트에 선행하는 선험적
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저자의 개념을 (곧 주체 중심주의)
텍스트 시간 속에서만, 텍스트를 읽을 때만 존재하는 생산자,
그것도 필사자 또는 편집자의 개념으로 대치한 포스트모더니
즘의 관점을 재진술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정곡을 찌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언술행위의 주체가 없이는 시 속의 나, 곧 언
술 내용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쓰기를
〈나를 지우기〉로 규정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때
나는 언술행위 주체로서의 나와 언술내용 주체로서의 나의 관
계를 있음/없음의 관계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고(이 점이
지금도 미진한 구석이고), 지금 이 글에서 말하듯 두 자아가
차이, 연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술행위의 주체와 언술 내용의 주체는,
내가 생각하기로는, 앞뒤의 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관계, 말하
자면 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주체는 있으면서 없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관계, 데리다식으로는 차연의 관계에 있다
는 점이다. 〈나〉라고 하지만 그 〈나〉는 모두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고, 언어의 본질은 차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
제는 앞으로 좀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3 준이와 나
시 속에서 나는 하나의차이로 존재하지만 그 차이는 계속
연기된다. 그런 점에서 차연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없
고 언어만 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텍스트, 밝은
방〉이 있고, 〈흔적〉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기호는 시니피앙
(말소리)과 시니피에(의미)로 구성되지만 시니피앙과 시니
피에 사이에는 자의적 관계만이 있고, 그런 점에서 기호는 무
슨 의미, 본질, 심층을 지시하지 않고 언어라는 체계 속에서
다른 기호를 지시한다.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지시하
고, 이런 관계가 차이이고 연기이다.
결국 무수한 텍스트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지금 〈당신〉이라고 쓴다. 〈당신〉이라는 기호는 누구를 지시
하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지시하는가? 내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을 지시하는가? 이 기호는 누구를, 어떤 실체
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말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기
능을 타나내고, 그런 점에서 차이이고, 동시에 〈당신〉의 의미
는 〈당신은 술을 마신다〉고 쓸 때, 말할 때, 중얼거리 때, 계
속 연기된다.〈당신〉은 술을 마시는 당신으로 연기되고, 〈당
신〉은 완성되자 않는다. 술을 마시는 당신은 다시〈당신은 잠
을 잔다〉에서 잠을 자는 당신이 되고 이런 연기와 차이가 있
다. 결국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연기가 있고, 차이
가 있고, 기호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말하기, 글쓰기, 시쓰기는 누가 수행하는가? 차연
이 수행하고 차연은 개념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차연은
흔적이고 타자이다. 시쓰기는 결국 시인의 부재를 알려주고,
시인의 부재는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죽음을 운반한다.
존재, 진리, 의미에 대한 질문을 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망
각이 진리이고, 시를 구성하는 주체는 없고 주체는 시 속에서
구성된다. 차연은 잡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타자이고, 불
확정적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결국 차연의 관계에 있다.
무수한 텍스트가 있을 뿐이다. 시인도 소재도 주제도 없다.
밝은 방 속에는 흔적이 있을 뿐이다. 어떤 흔적인가? 타자의
흔적일 것이다. 그리고 흔적이 타자이다.〈오오 쓴다는 것은
내가 언어이며 타자라는 사실이고 타자의 타자가 나라는 사실
이고 이 나는 무수히(글을 쓰는 만큼)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라고 이승훈 씨는 말했다. 그리고 지금 말한다. 이 말 역시 차
연이고 흔적이고 타자가 하는 말이다.
타자, 흔적, 차연으로서의 시쓰기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
다. 나도 잘 모르겠다. 모른다는 건 자랑이 아니지만 부끄러
움도 아니다. 인간에겐 모를 권리가 있다. 아마 무지에의 열
망일 것이다. 무지는 순결이고 우리 준이이고 준이의 흔적이
지금 이 방, 이 글을 쓰는 작은 방을 가득 채운다. 기원도 없
고 본질도 없다. 오직 문학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있고, 문학
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제도가 있고 장르가 있을 뿐이다. 그렇
다면 내가 할 일은 박상배 시인과 함께 이 문학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싸우는 일이다. 이 싸움은 그동안 두 가지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하나는 문학의 자율성, 일관성, 통일성을 해체하는 방법이
고, 다른 하나는 문학, 혹은 시의 제도성을 해체하는 방법이
다. 전자는 「노예에 대하여」(『문예중앙』, 1996년 여름호),「이
글쓰기」(『현대시사상』, 1996년 겨울호)에서 이른바 파련의
기법, 혹은 좀더 유식하게 말하면 뿌리가 혹은 산종(dissemi-
nation)의 기법으로 수행괸 셈이다. 물론 크게 보면 이런 시들
도 복수성의 개념에 포섭되지만 의도는 시적 통일성, 한 편의
시 속엔 오직 한 편의 시만 존재해야 한다는 이상한, 그러나
한번도 의심하지 않은 부르주아적 허구성을 파괴하는 데에 두
었다.
이런 산종, 혹은 파편와는 기쁜이고 쾌락이고, 어린 시적의
순결이고 놀이이다. 혹자는 놀이를 비판하지만 논다는 것이
왜 나쁜가. 놀이는 해방이고 자유이고 꿈이다.「이 글쓰기」에
는 세 개의 파련이 존재하고, 형태도 하나의 큰 부분을 왼쪽
에서 파고드는, 그러나 독립성을 유지하는, 독립성을 유지하
면서 유지하지 않는 두 개의 파편으로 구성된다. 그러니까 세
개의 파편으로 구성된다. 시의 앞부분만 옮기면,
난 글쓰기를 두려워했다 글쓰기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할까? 난 글쓰는 환자 불안 때문에 별이 든 이승훈 씨는 우울
때문에 병이 든 이승훈 씨다 그러나 어제부터, 꿈속에서 박
목월 선생님이 나타나시고 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
쓰는 환자들은 행복하다 글쓰기
난 글을 쓰면서 커피를 는 병을 치료하는 한 가지 방법
조금 마시고 담배를 피 이다 어제는 「문학의 역사는 폐
우고 바카스를 조금 마 허의 역사」라고 글을 썼다 30매
시고 아무것도 마신 건 를 쓴다는 게 35매를 썼다 원고
없다 아무것도 달라진 료를 조금 더 받으려고 그런 건
건 없다 아무것도 생긴 아니다 물론 난 어디로 갔던가?
건 없다 사라진 것도 글을 쓰면서 난 컴퓨터를 두드
없다 이 종이를 보시오! 리면서 동시에 창 밖을 볼 순 없
다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그러나 담배는? 오 담배를 피우며 컴퓨터를 두드릴
순 있다 담배는 그만큼 인간적이다 담배를 모욕해선 안된다
난 흐린 날을 두려워했다 흐린 날이 오면 흐린 날이(하략)
와 같다. 의미는 계속 연기되고, 전환되고, 접복되고, 나도 무
슨 소리를 한지 모르겠고,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이다. 통
일성도 없다.
그런가 하면 「준이와 나」(『현대시사상』,1996년 겨울호),
「쏘파 이야기」(『현대시학』,1996년 6월호), 『뒤샹의 샘?』
(『현대시』,1997년 1월호)에서는 제도로서의 시, 혹은 인습
으로서의 시, 시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해체한다. 「준이와 나」
는 준이를 안고 있는 나, 준이와 내가 함께 있는 사진을 제목
만 붙여 시랍시고 발표했다. 많은 시인들이 욕을 했는지는 모
르지만 욕을 했을 것이다.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 이 시 ㅡ
사진을 쓰면서 오리면서 붙이면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시의 전문을 다시 옮겨
본다.
135쪽 사진
제목만 있고 시는 없다. 그렇다면 사진이 시란 말인가? 시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사진은 1995년 겨울 아내가
찍어준 일종의 기념사진이다. 가족 앨범에 넣으면 기념사진이
된다. 그러나 앨범에는 제목 같은 건 안 붙인다. 붙이는 사람
들고 있겠지만 나는 안 붙인다. 나는 이 사진에 제목을 붙였
고, 시 계간지에 발표했고, 시를 쓴 사람이 이승훈이라고 밝
혔다. 그러니까 엄연히 시다. 쓴 사람 이름이 나오고 시지에
발표하면 시가 된다.
그러나 앨범에 붙이면 기념사진이 되고, 내 책상 앞 벽에
걸면 사진 ㅡ 그림이 된다. 잃어버리면 내가 찾는 물건이 되고
사진관에서는 돈이 되고 준이게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되
고, 장난감이 된다. 시는 어디 있고 사진은 어디 있는가? 시는
시라는 이름의 제도 속에 있고, 사진은 앨범이라는 이름의 책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시는 누가 쓴 것인가? 아내가 찍었으므
로 아내가 저자인 것 같지만 분명히 내 이름이 나오므로 내가
저자인 것도 같고, 그러나 나는 제목만 붙였다.
저자는 없다. 낱말, 글, 문자는 저자의 부재, 죽음을 운반한
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의 저자로 원고료를 , 그것도 4만원이나
받았다. 고마운 일이다. 4만원이 어디인가? 파출부 하루 노동
의 대가는 3만5천원이다. 뒤샹에 대한 관심도 비슷하다. 뒤샹
이 피카소보다 매혹적인 이유는 뒤샹의 작품은 매체들, 장르
들 사이에 존재하지만 피카소의 작품은 그림이라는 실체로 존
재하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은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사진에
물감만 칠하고, 그것도 계속 반복해서 필하고 위대한 예술가
가 되었고, 보이스는 한 술 더 떠 물감칠도 하지 않고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 나는 이런 예술가들을 존경한다. 예술은 없
고 예술이라는 제도만 있고, 이 제도가 예술을 잡아먹고, 이
들은 이 제도와 싸웠기 때문이다.
예술은 업이고 사막이고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사
실을 깨닫는 일이고 해탈이고 그런 점에서 위대한 놀이이다.
우울이 사막이지만 사막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다. 확정할
수 없는 것, 목적도 없는 것, 기원도 없는 것, 다만 무엇인가 생
기고 있는 것, 흔적, 존재가 아니라 과정이 진리이고, 오류가
인생이고 행복이다. 밖은 안에 있고, 안은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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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강좌[관리자전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