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문학의 길
수필을 어찌 '남'이 쓰랴?
허 학 수
내 문학의 시공은 도농의 고개를 두루 넘지 못한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산간 농촌이 소재의 중심층이며 주제의 방향이다. 말하자면 일상의 체험으로 수놓인 평탄한 삶의 길이며, 누구나 공감하는 평이한 문학이다. 그렇지만 아무나 걷고 있는 그저 그런 인생길이 아니라 중도에서 탈락할 뻔했던 쓰라린 변화와 고독의 삶이다.
누가 뭐래도 내 지난 세월은 외적인 억지낙천보다는 내면에 스며 있는 고통과 슬픔이었으며 평범 속에 잠재된 비법의 산실이었다. 시냇물이 졸졸거리는 산모롱이를 돌아야만 초등학교가 보이고, 오십 리 길을 걷고 뛰었으니, 산야에서 풍겨 나온 순수 서정과 함께 청소년 시절에 이미 문학의 냄새를 맡았다고 할까.
작가의 꿈이란 애당초 나의 인생 설계에는 빠져있었다. 그렇지만 문학의 씨앗은 내 가슴 심층부에 심어졌었나 보다. 지금도 생생하지만 열네 살, 그 해의 '어머니날'에는 할머니의 곱추등을 어머니의 젖꼭지로 둔갑시켰으니 교내의 장원은 어디로 갔겠는가.
문학이란 자기의 바른 표현이다. 더욱이 수필은 참 인생의 진면목이다. 여자를 변장시켜 남자로 가식하는 것보다, 예쁜 사람을 달리 꾸며 더욱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이 바로 수필의 비법이기도 하다. 개인 수필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개성적인 글일 뿐, 남이 요구하는 심오한 단어나 수려한 문장이 될 수 없다. 제아무리 대가의 강연이나 특출한 세미나일 망정 이미 굳어진 타인의 문체는 빼앗거나 억제할 수 없는 수필의 독특한 몫이다.
나는 아마도 내가 살아온 곡절한 사연 때문에 문학이란 대평원을 향해 호미와 낫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밟히고 밟아도 되살아나는 오솔길의 잡초처럼 먹고 또 먹어도 거절할 수 없으며, 때로는 맵고 짜고 시더라도 언제나 찾아야 할 김치 같은 수필을 쓰고 싶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글 쓰기에 대한 고결한 취미는 몰라도 남다른 소질만은 가졌던 것 같다.
펜은 칼보다 무섭고 좋은 편지는 장사의 팔뚝보다 힘이 세다. 글 쓰기를 좋아했던 지난날, 나는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신해서 많이 써주었다. 편지지를 앞에 놓고 끙끙거리던 동급생, 몇 번을 찢어가면서 어렵사리 글을 보내고도 답장을 못 받아 속을 태우던 지우는 물론, 오빠를 군대에 보낸 누이가 남몰래 찾아오면, 깊은 밤 그리운 사연을 정겹게 대필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소년시절 나에게는 외부로 드러나는 취미보다는 내부를 움직이는 의지적 소질이 있었으며, 감정을 요리하는 유혹적인 단어 구사와 집중적 문장력도 태동했던 성싶다.
이제는 꿈같은 시절이다. 사랑의 정점으로 도달하기 위하여 환경과 처지를 뛰어넘는 위선과 요술이 필요한 나이였다. 때마침 4·19가 일어나 서울의 소식이 궁금하던 대학 초년, 우리는 주고받는 시간이 단절되지 않도록 펜을 들었다. 구구 절절 애틋한 정념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한아름 보관한 상자도 따로 있었건만, 세월 포갠 그 날에는 여념 둘까 한이 되어 눈물로 얼룩지는 흔적까지 지웠었다.
그 때 그 시절 오고간 편지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면 그 얼마나 소중하련만, 반쪽 결혼에 머물던 그 해 정월대보름에 미련 두지 말자고 조각조각 재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랑이란 불어오는 바람이요, 윤회하는 계절인 걸 하얀 밤 지새워도 남는 것은 그리움과 상처뿐이었다.
새삼스럽지만 글 쓰는 사람에겐 삼다(三多)가 필수이다. 그런데도 나는 다독을 하지 않는 편이다. 명인 대가의 걸작이나 유명 작가의 명작도 섭렵하지 않았고, 범인의 범작도 다독하지 못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출판시대에 지인의 옥서가 도달되어도, 서문부터 결미까지 통독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군데군데 가려 읽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니 이것 또한 작가의 자질에서 탈락한 까닭일까. 아니면, 사람은 많아도 작가는 적고 작품은 많아도 수필은 적으며, 읽을 거리는 많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는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수필 쓰기의 흉내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의 걸작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버릇이 있다. 말하자면 나도 부지런히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자신과 오만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정말 큰일이다. 작품을 많이 읽지 않고, 문장수련에도 게을리 하고,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에 세월만 허비하는 편이니, 이것이 바로 내 수필작법의 커다란 흠이라고 하겠다.
돌아보면 나의 문학역사는 한 세대가 훨씬 넘는다. 처음에는 신문, 잡지, 방송 등에 투고를 하다가 드디어는 작가라는 반열에 이름을 새기고, 이제는 경향 각지 선후배의 격려와 사랑을 흡입했으니 말이다. 지나간 어느 날, 여기저기 문예지가 유혹을 해도, 오직 한 곳 『수필문학』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며 이보다 귀한 장르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나는 나를 믿고 싶다. 지난 밤 3차에 걸쳐 소주 맥주를 짬뽕 했어도 별이 잠든 인시에는 거뜬히 일어난다. 몇 십 년을 지나봐도 이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고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은 화장실이라고 생각한다. 습관인 양 몸은 어느새 어둡고 지루한 터널을 지나 천공을 비상할 듯 가뿐해진다. 이뿐인가, 취할 듯 말 듯, 적당히 마신 술의 순간적 묘미는 부귀와 명예도 당하지 못하리니, 이 때에 상기되는 갖가지 사념은 두뇌 작용의 절정을 이루고도 남는다.
나는 수필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첫새벽의 기발한 사고와 술자리의 취기 직전 정심은 내 작품의 유일한 소재로 남기곤 한다. 아무리 타일러도 남의 작품이나 이론을 반듯한 규정이나 철칙으로 여기지 않는 것도 탈이다.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는 자기의 글이 바로 수필인데, 시작이 반 인줄 알고 부단히 수련하면서 다듬는 여유만 가지면 된다.
이제는 나도 한가롭고 풍요하다. 그래서 진짜 문학인 수필을 쓰고 있을까. 나에게 어리석다고 손가락질을 해도 좋고 돌아앉아서 비웃어도 대꾸하지 않으리라. 어차피 삶의 끝은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보따리를 풀어놓고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거짓 없이 살면서도 욕심조차 부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밥도 아니고 반찬은 더욱 아닌 수필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으련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순간 순간을 기억에 의존할 수 없기에 종이와 펜은 항상 소지해야겠다. 술자리는 고사하고 내일 아침 인시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남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이면서 그리운 사람도 만나고 싶다.
그것이 수필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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