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시의 일반적 소고
1. 서론
한국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는 파시즘, 경제공황, 구인회의 결성(1933), 카프의 해체(1935) 등의 사건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요한 시기이다. 이 시대는 역사적 격동기로써 문학의 침체와 새로운 활로 모색이 자극되었고 시인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심한 괴리감을 경험하였던 시대이다. 1920년대 중반 이래의 리얼리즘 문학이 이 시기에 이르러 침체되기 시작하고 창작기술의 혁신과 문학형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구인회 중심의 모더니즘 문학이 본격화 되는 것이다.
김기림은 그의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에서 모더니즘을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을 위해서이고 다른 또 하나는 당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고 하여 “문명의 아들”, “都會의 아들의 탄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기림의 시가 보여주는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의 극복으로서 감각적 요소와 작품과 병행시킨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수로서의 김기림이 보여주는 몇 가지 선행과제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30년대의 사회적 상황에 따른 리얼리즘 문학의 등장 과정을 검토한다. 모더니즘 세대 즉, 도시세대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구인회>의 결성과 모더니즘운동에서의 그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김기림이 내세운 새로운 문학정신의 실체를 이해하고 발생론적 측면에서 모더니즘의 성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2. 새로운 문학정신
1) 구인회의 역할
구인회는 1933년 카프중심의 리얼리즘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속에서 자라난 도시세대의 집합체로서구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모더나즘의 국내 확산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학운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김기림을 비롯하여 정지용, 박태원, 이상 등의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시인 작가들이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구인회의 조직과 활동, 성격 등을 알아보자면, 모더니즘의 기수 김기림이 1933년호에 쓴 산문 <써클을 선명히 하자>에서 자명한 의미를 준 새로운 문학을 위한 ‘간판’으로서의 써클이 요망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성문학과 자신을 구별짓는 것이자 현문단의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위한 것이었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문학써클을 희망하고 있고 그 희망은 같은 회 ‘구인회’의 결성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된다.
2) 모더니즘 운동
193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문학에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널리 알려진 바 모더니즘의 문학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론과 시를 통해서 주도한 사람이 바로 김기림이다.
그는 특히 시에서의 주지주의를 제창했는데, 그 동기는 김기림이 영미문단에서 주지적인 비평가 또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에즈라 파운드, 엘리어트, 허버트 리이드, 리처즈 등의 시롬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국시단에서 하나의 전통처럼 이어져 온 감상적이며 영탄적인 시풍을 극복해야 하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핵심적인 의도에서 자연발생적인 감정시를 깨뜨리고 시에서 감각적, 공간적인 표현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한국모더니즘 시 운동은 기왕의 시 일체를 거부하고 정서적 우세에 지성적 우세를, 현실에 대한 초월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적 적극성을, 청각적 요소에 대하여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데 그 특색이 있다. 김기림은 시론에 있어서도 감상과 비탄 혹은 이데올로기의 마음을 제거하고, 대신 태양의 건강한 풍속을 내세운다. 그는 처음부터 시에 있어서 회화성과 건강성을 추구한 시인이며 이론가였다.
3. 김기림 시의 특질
앞에서 김기림의 시를 이해하는 전제조건으로 구인회의 역할과 그에 따른 모더니즘 운동의 전개와 발전 과정을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김기림이 선두 기수로서 활동해 온 모더니즘은 현대에 살고자 한 시인, 작가들의 문학으로써 그 전형적 속성은 역시 현대의 도시적 생존방식과 도시적 감각이 결합된 도시문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감상주의적 시의 부정과 프로문학의 정치적 시의 부정으로 한국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두가지 부정작업으로 출발한 김기림의 모더니즘 이론과 시세계에는 몇 가지 특질을 발견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여러 가지 새로운 시형식을 실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의 풍속>은 건강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열망을 토로한 것이고, <해도에 대하야>는 시인의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결별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은 현실과 관념에서 방황한다는 그의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옥상정원>은 백화점의 옥상에 올라간 시의 화자가 도시사회에서의 소외를 경험하고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풍자, 비판한 작품으로 구어체로 되어 있다.
두 번째로 여러 가지 창작방법의 기술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시의 길이의 변화(단시.장시)와 명사와 명사의 나열, 활자의 시각적 배열과 언어의 알레고리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는 기존의 일체의 시형식을 거부한 이미지즘, 주지적 방법을 주축으로 하여 시를 쓰며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 시에 어떤 일관된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시의 충만한 자극에 이끌리고 있으나, 바다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건강한 세계에 대한 꿈을 지속적으로 표현한다. 그 소망이 의지를 수반할 때 문명비판과 풍자의 형식이 된다. 이 풍자와 그의 창작기술이 가장 성공적으로 결합된 예가 <전율하는 세기>이다.
김기림은 1930년대의 시인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시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그것을 실험한 문인이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당면과업으로, 그것 자체는 시사의 발전적인 의미에 있어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다만 그 과업의 전개 가능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더니즘의 이론 밑에 그가 실험한 시는 종래의 한국시에 비하여 대단히 싱싱하고 새롭게 보이지만, 그러나 깊이 읽어 보면 이국적인 의상으로 몸치장을 했다는 기교주의 인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4. 김기림의 모더니즘 시
1) <기상도>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衣裳을 둘른 젊은 山脈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의 절정에 가로 누었다.
헐떡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고
敎堂의 녹쓰른 종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 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停車場
車掌의 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지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중략......
이 시는 1936년 창문사에서 간행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의 표제시이다. 모두 424행의 장시로 <세계의 아침>, <시민행렬>, <태풍의 기침시간>, <자최>, <병든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 7부로 이루어져 있다.태풍의 내습과 강타를 알레고리라는 단편적 상황으로 설정하여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태풍의 진행과정을 따라 1-2부는 태풍이 발생하기 이전, 3-4부는 발생과 진행, 5-6부는 태풍 내습 후의 파괴된 풍경, 7부는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을 서술하였다.
<황무지>를 지은 엘리어트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기지와 해학, 풍자, 반어 등의 수법을 통해 지성적인 시를 쓰려고 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지용이 <바다2>에서 바다를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랐다”로 율동감이 있게 묘사한데 반하여, 김기림은 바다를 “비늘 / 돋힌 / 해협은 /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로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기상도>의 이 부분은 확실히 그때까지의 한국시에서 전혀 구경할 수 없었던 새롭고도 경이적인 국면이었다.
그러나 당시 모더나즘 문학의 저변이 얕고 작품의 철학적 기반에 대한 이해도 확실하게 갖추지 못하여 실험작에 머물렀다. 하지만 당시 지나치게 내용위주로 기우는 신경향파와 기교에만 관점을 둔 시문학파와의 중간적 입장을 새로운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기상도>는 모더니즘 시의 사회성 확보라는 새로운 요구와, 자신의 시 작품 수준의 함양이라는 오랜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한 의욕적이고 모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날아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려서
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 시는 현실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김기림의 열정적인 의지가 결국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좌절 또는 허무의식에 빠져 있음을 시사해준다. 흔히 한국 모더니즘 시를 주지주의라 했고 새타이어, 위트, 이질적인 두 이미지의 결합 등을 지적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김기림의 그 지적 감상이 어느 정도 균형을 취한 작품으로 <바다와 나비>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스펜더의 작품과 유사성을 가진 것이며, 이미지스트 시의 한 특징을 선명히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5. 결론
1930년대 모더니즘의 논의가 활발했던 구인회의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의 활동, 특히 김기림의 시와 비평은 낡은 시학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의 시를 모색하고 있었고 신진 시인들의 시작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절제한 감정주의와 특정한 사상을 중시하는 내용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내세웠던 김기림의 주지적 방법이란 일정한 미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시를 지성에 의한 절제된 언어로 제작하였다. 그것은 종래의 시작 태도에 대한 방법론적 전환으로서 문학형식의 역사적 변화와 근대 기술문명의 발다을 대응관계에서 인식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와 같이 김기림의 시적 양상과 전개과정에서 보여주는 특질들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구인회를 주축으로 근대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문학형식을 모색한 데 일차적인 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차적으로는 김기림이 모더니즘 작품에서 나타낸 바와 같이 도시적 생존방식과 새로운 언어감각과 실험의식을 결합한 일종의 도시문학을 탄생시킨 데 있다.
김기림의 시의 지적인 허구성은 그의 시적인 인식이 조국의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그저 서구적인 것만을 선택의 기준도 없이 맹목적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가 과거의 시를 부정했지만 그의 시 역시 다음 세대에 의해 거부 당했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모더니즘의 시 운동은 한국 시단에 큰 명맥을 이루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기림이 그때까지 한국 문단에서 시와 시론을 전개한 유일한 문인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기상도>가 이 땅에 등장한 최초의 모더니즘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은 시사적인 측면에서 의의가 크며, 현대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단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시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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