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해
내 여자는 동해 푸른 물과 산다.
탁류와 해초들이 간간이 모여
이룩하는 근해의 평화를 꿈꾸지 않는다.
저녁마다 아름다운 생식기를 씻어 몸에 담고
한층 어렵게 밝아오는 먼 수평까지 헤엄쳐 나가
아침이면 내 여자는 새 바다를 낳는다
살을 덜어 나의 아들을 낳는다.
내가 이 세상의 홀몸 이기지 못해
천 리 먼 길 절뚝여 찾아가면
철책 너머 투명한 슬픔의 알몸을 흐느끼며
문득 캄캄한 밤바다 되어 말 못하게 한다
다시는 여기 살러 오지 말라 한다.
<원망스럽고 고마운>
1986년이었고 3학년이었고 스물 둘이었다. 연애는 깨지고 공모엔 떨어지고 11월이었다. 나는 학교 앞 술집에 단골 출석하거나 하숙집 구석방에 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어쩌다 정신이 들면 강의실을 찾곤 했다. 19세기 영소설인가 20세기 미국신가 하는 수업에 교재도 없이 들어갔다가, 장재영이란 친구와 함께 무작정 동해로 떠났다. “나갈까?” “응.” “어디로 가지?” “동해로.” 왜 동해였는지, 마장동이었는지 상봉동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버스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서 갔다.
동해는 거칠고 캄캄하고 축축하고, 무엇보다도 먼 바다였다. 그 바닷가 삼숙이 매운탕 집에서 “명태 잡이 불빛 한 척 띄워놓고 갓 돋은 살 부비며 동해 전체가 운다”라거나, “아무것도 낳아주지 않는 어머니/ 그저 영원히 사랑일 뿐인 그대”라거나, “여자여, 거대한 손을 펼쳐 소금처럼 익사한 나를 건져놓아라” 따위의 구절들을 읊조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돌아왔을 땐 영 딴 시가 나왔다.
영문과의 가을 시화전을 앞두고 소주를 한 병쯤 마신 상태에서, 친구들과 표구 작업을 하면서 나는 이 시를 술술 써내려갔던 것 같다. 시상 전개에 가해지는 이런저런 압력, 그러니까 시어의 취택이나 이미지 공정, 리듬의 고려, 무엇보다도 의미의 전달을 의식하지 않고 멍한 상태에서, 다리를 꼰 채로 덜렁거리면서였다. [동해]는 내 습작시절의 작품 목록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이처럼 내가 썼는데도 왠지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나서 쓰지 않고 쓰고 나서 생각했다는 느낌. 머리가 쓰지 않고 손이 저 혼자 움직여 적은 것 같은 어떤 추상적인 느낌.
1998년에 시인이 될 때까지, 나는 줄곧 또 한 번 그런 상태에서 시를 써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동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시를 작파하고 취직해서 술상무가 되었거나, 의리나 따지는 양아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원망스럽기도 고맙기도 할 밖에.
{시인세계},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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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