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 김미령
증발하던 수분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수 만 개의 창으로 다시 돌진하고 있는가
빗소린지, 라디오 소리인지,
무수히 교신하는 길고 가느다란 음률들에
눈 못 뜬 주머니쥐처럼 방안에 담겨 졸다
문득 어젯밤 친구의 울음이 실수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바깥에는 바람의 기둥이 뽑혀 날아가는지
어느 동굴의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 거대한 기류의 대이동에
온갖 플랑크톤과, 오징어 떼와, 산란기의 알들이 합류해서
먼 우주로 여행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참나무 껍질 아래 엎든 하늘소처럼 나는 얌전해져서
희미한 소리로 끽끽거리며 더듬일 움직이고,
저 어둔 하늘에 먹물처럼 번진 수많은 이파리들을 상상하고,
갑자기 먼 나라로 이민 간다는 친구의 선언이
아주 우연하게만 여겨지기도 한다.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미완의 거대한 방주들이
해저대륙을 움직이듯 서로의 열을 바꿀 때
건너편 바위 위에 기어오른 참고둥 한 마리
멀리서 몰아온 물맛을 뿌리에 내장하고,
나는 어느 미세한 기억을 가지고 이곳 바위에 옮겨 붙어
오래전부터 예감한 나선형을 완성했을까 생각하다
그 회오리 속에 빨려들 듯 다시 조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는지, 아이들 악악거리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리다 말다, 먼 이국의 언어처럼……
1975년 부산출생.
부경대 국문학과를 졸업 .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흔한 풍경〉으로 시부문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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