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근대성' 내용 채우기 온 힘 / 김윤식
(1992.1.12, 한겨레)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 (김윤식)
김윤식(56·서울대 교수)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처럼 보인다. 그의 한 제자가 작성한 '김윤식 저서 목록'에 따르면 그가 지금까지 써낸 책은 72년의 {한국근대문학사상}에서 시작해 거의 50권에 이른다. 재수록한 글들이나 동일한 주제를 변주한 글들을 창작해도 60년대 이래 그가 치러낸 집필 노동의 양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저 {이광수와 그의 시대}의 집필 과정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부터 12시까지 매일 20장 분량으로 써나갔고 개학이 되었어도 집필 분량만은 늦추거나 줄이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하루 20장이라는 그의 글쓰기 리듬은 그의 저작활동 전체를 통해 대체로 유지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2백자 원고지 10만장에 가까운 그의 글들이 생산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 '김윤식 저서 목록'은 또 76년의 {문학비평용어사전}을 비롯해 그가 엮거나 우리말로 옮긴 10권의 책을 수록해놓고 있다. 그러니, 그는 우리 지성사에서 전무후무한 다산성의 비평가--학자로 기록될 것 같다. 외국의 경우를 보아도 이론가로서 김윤식씨 이상의 집필력을 보인 사람은 일생 동안 2만쪽 분량의 책을 써냈다는 스위스의 아동심리학자 장 피아제 정도가 얼른 생각날 뿐이다. 더구나 김윤식씨는 그 많은 분량의 글을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 ·퍼스컴의 도움을 받아 쓰는 것이 아니라 2백자 원고지에 볼펜을 꼭꼭 눌러 쓴다. 정열과 건강이 없이는 큰 학인(學人)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예는 보여준다. 그의 정열이 글쓰기로만 쏠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직업이 비평가인 이상 그는 끊임없이 읽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도 여러 문예월간지에서 달마다 발견되는 그의 소설월평은 김윤식이라는 이름이 동사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김윤식씨의 글쓰기가 우리 문학 연구와 비평에서 세운 가장 큰 공로는 일제하 진보적 문인들의 사상과 작품과 삶의 복원이다. 70년대 이래 그의 학문적 정열을 흡수한 우리 근대문학 연구는 자연스럽게 일제 시기의 좌파 문학에 대한 천착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한국지성사는 80년대 대학 국문과를 휩쓴 '카프 열풍'의 초석을 얄궂게도 이 보수적 학자·비평가에게 빚지고 있다. 민족·민중문학진영의 어느 연구가도 우리 문학의 진보적 전통에 속하는 근대작가·비평가들에 대해서 김윤식씨 만큼 깊고 넓게, 그리고 오래 공부하지는 않았다.
좌파 문인·문학에 대한 탐구가 그의 이념적 지향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76년에 "박종화 이헌구 김동리 조연현 조지훈 등의 '민족단위'의 문학전개는 민족문학의 정통성으로서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한국현대문학사} 서문)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이념의 입지를 분명히 한 바 있다.
{한국근대작가론고}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 {한국근대문학양식론고} {한국근대문학양식론고} {한국근대문학사상사} {한국근대문하과 문학교육} 등을 포함한 그의 여러 책의 제목들이 암시하듯,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근대문학'이다. 그는 "발표될 수 없는 재북작가들에 관해 연구랍시고 글을 썼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연구한 것은 근대문학이지 재북·월북작가가 아니었다."([이광수에서 임화까지], 1989)
그에게 "근대란 자본주의와 관련된 것이며 자본주의를 승인하든 비판하든 그것을 중심부에 놓지 않고는 근대문학사 연구란 불가능한 것"({한국근대문학사론} 서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근대성'은 '가치중립성' '중인의식' '합리성' '균형감각' '일상적 삶의 감각' '방관자의 심리적 메커니즘' '역사적 상대주의' '도저한 허무주의'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 '가치중립성'은 염상섭에서 구효서에 이르기까지 그가 소설을 평가하는 것은 그의 필연성에 말미암은 것이어서 그것의 우열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상도 다른 사상과 원칙적으로 등가라고 말해질 때, 우리는 사상연구의 객관적 연구의 폭과 깊이를 유연성 있게 해낼 수 있다"({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 서문)라는 발언을 낳는다. 그리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과도기로서의 그의 근대문학은 언제가는 도래할, 민족문화의 유토피아로서의 민족단위의 전체성(분단의 극복)을 꿈꾼다.
김윤식씨의 방대하고 치밀한 실증적 작업 덕분에 우리 문학사에서 자기 영토를 처음으로 확보하거나 늘린 작가들은 수두룩하다. 그의 숨없는 글쓰기는 카프의 이론가·작가, 월복·재북작가들을 그의 여러 책에 분승시켜 놓은 외에, {이광수와 그의 시대} {안수길 연구} {이상 연구} {김동인 연구} {염상섭 연구} {임화 연구} {박영희 연구} 등의 독립적인 전기비평을 낳았다. 그 책들을 내며 저자는 대상 작가들의 '내면 풍경'을 엿본다. 그 엿보기에 협력한 이론가들은 헤겔 루카치 골드만 바흐친 푸코같은 사람들이다.
근대성이나 리얼리즘에 대한 김윤식씨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한국문단을 짓누르며 치솟아 있는 김윤식 문학의 마천루에는 위압감을 느낄 것이다.
나의 삶, 나의 추구(김윤식)
(1995.12.18, 동아일보)
작가가 되기 위해 진학한 나는 당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었던 까닭이다. 작가 대신 학문쪽으로 전향한 결과 학위논문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가 씌어졌다.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규칙의 발견이나 이론의 정립에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고 그 전단계인 문헌학적 연구였다. 여기에는 설명이 없을 수 없는데 자료의 발굴 및 정리란 당시로서는 모두 터부시하는 영역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터부의식이 곧 내 연구의 규칙 몫을 한 셈이다. 이를 나는 근대성이라 불렀다. 카프문학이 내 연구의 출발점이었음은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내게 있어 근대성이란 그러니까 자명한 해답이 주어졌다.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의 완성과정, 경제적으로는 자본제 생산양식의 완성과정으로 요약되는 것이 근대성이라면 우리 문학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이 보편성으로서의 근대성이 식민지화된 우리의 경우 어떤 곡절을 겪었던가에 부닥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제투쟁과 반봉건투쟁이라는 두 항목이 한국사의 특수성으로 육박해 오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각각의 요소에 직간접으로 걸려 있는 것이 이른바 카프문학이라고 나는 보았다. 카프문학을 좌표의 원점에 놓고 그 위로 거슬러오르기와 그 아래로 훑어 내려오기가 내 연구의 언어 영역이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영역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학 연구 자체가 그야말로 사회개혁이랄까 국가건설 이념의 일환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쓴 책의 출판이 금지되고 연구용 책이 압수되는 상황이 내 연구실 주변을 에워쌀수록 그러하였다. '루카치의 별'로 상징되는 이러한 분위기는 80년대 중반 이후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구권이 무너지자 그토록 빛났던 별이 흐려졌고 그 너머로 다른 지평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코제브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에 마주치면서 나는 조금씩 허탈해지기 시작하였다. 근대성이란 끝장나고 역사는 새로이 시작되는 것일까. 그 새로운 역사의 첫머리에 내가 사는 시대가 노출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묵은 근대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알아보고자 하는 내 앞에 뚜렷이 다가온 것이 김동리 문학이었다. '구경적(究竟的) 삶의 형식'으로 요약되는 김동리의 문학과 그 논리는 철저한 비근대성이었다. 만일 반근대라면 그것 역시 근대성에 내포된 사상일 터이지만 이상하게도 김동리의 논리는 몰근대이거나 비근대여서 어떤 근대성 논의도 여기서는 제로화되고 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근대문학사상연구 2}가 그러한 모색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화해랄까 조화에 모든 가치를 두는 루카치적인 발상과 모순을 모순 그 자체로 인정하고 나아가는 아도르노적 발상이 모두 성립된다는 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성(理性)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는 내 출발점이었던 헤겔 루카치에 동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이성'이 어떤 모교를 향해 직선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구화된 이성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을 바꾸면 세계란 변혁의 대상이기보다 타자(他者)로 존재한다는 인식의 변화다. 일회적 존재인 인간이 그 연속성 획득을 위한 몸부림으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가운데 둔 하이데거의 실존적 해명이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이었다. 개인과 사회란 모순된 상태로, 그 자체로 수용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 나름의 현상학적 환원 앞에 나는 방황하여 마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내 학문의 출발점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젊은 내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이 그것. 그러나 그 환원은 다만 마음뿐 굳어버린 내 감성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회색에 다시 회색칠을 해도 생명의 녹색은 되살아나지 않는 법, 다만 이 장면에서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영역이 있다면 비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참으로 딱하게도 비평에 나아갈수록 나는 또 당황하지 않은면 안되었다. 시와 소설과는 달리 비평은 스스로 비극을 연출할 수 없음이 그것. 정신과 정신이 충돌하는 장소, 그러니까 부정하는 정신으로만 성립되는 것. 이는 시지프스적 형벌이 아니고 새삼스레 무엇일까.
＜문학＞ 우리시대 최대의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
( 97년 05월 12일, 국민일보)
그는 한국문학에서 가장 많은 문학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장 비평가로 손꼽힌다. 전국에서 쏟아져나오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들을 읽어내고 그것에 일일이 비평을 곁들이면서 이광수 염상섭 이상 임화 김동리 등 한국문학에 「말뚝」을 꽂은 한사람 한사람을 통시적으로 훑어내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金允植씨(62^서울대교수).그의 작업에 경의를 표하며 서울 동부이촌동의 그의 서재를 찾아갔다. 책상 한편엔 눈알 하나를 흰종이로 가린 망원경이 놓여있다. 집필하다 말고 가끔 밖을 바라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망원경의 눈알 하나를 막아놓은 것은 외눈으로 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
최근 펴낸 「현대문학사 탐구」(문학사상사刊)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누군가 읽기 쉬운 글이라고 평하긴 했으나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현대문학사조를 모르고서는 읽기 어려운 글이어서 많은 각주까지 달았다』 매우 진지한 대답이었다. 흔히 말하는 그의 놀라운 多産의 저력도 그처럼 진지한 글쓰기의 산물임이 분명했다.
혼돈이 지배하는 세기말. 그의 문학비평 잣대가 궁금했다. 『(커피잔을 가리키며) 커피맛은 혀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결국 혀가 발달된 사람이 맛을 가장 잘 아는 법인데 문제는 그것이 경험주의라는 사실이다. 경험주의의 약점은 퇴폐적으로 되기 쉽다는 것으로 새로운 맛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비평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 이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진리가 눈에 보인다던 사람들이 소련이 붕괴되고 마르크스주의가 무너지니까 이제는 자신들이 믿었던 것을 상대주의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커피의 예에서 보듯 경험주의도 상대주의도 절대적인 만고불변의 가치는 아니다. 그의 잣대는 바로 언어 그 자체다.
『인간은 언어에서 출발, 언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말을 만들었지만 말을 컨트롤하지는 못한다. 말 자체가 곧 물질 아닌가. 인간 자체가 말이고 언어다. 문학의 텍스트는 바로 인간이다』
그는 몇년전 「환각을 찾아서」라는 책을 냈다. 왜 환각인가. 『시나 희곡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으나 소설은 다른 것이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소설(로망)이 시작됐다. 따라서 근대가 끝나면 소설이라는 장르도 끝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시작될 때 돈키호테가 나왔지 않느냐. 이렇듯 인류사와 같이 가는 것은 소설밖에 없다』
그 말에는 비장한 구석이 있다. 소설이 끝나면 인류사도 끝난다는 것인가. 근대가 만들어낸 장르인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문제아로 뭔가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욕망으로 가득찬 인간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한번도 도달하지 못했던 세계,근대를 넘기 위한 숱한 모색, 그가 말하는 환각은 「인류의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 따위는 그 길의 안내자일뿐, 목적지까지 인도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사실 갈팡질팡 살았다. 이것이 맞다거나 저것이 맞다거나 무엇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서고에서 69년 일본 도쿄대 유학시절에 산 헤겔주의자 루카치의 원서를 꺼내 보여주었다.「소설의 이론」.그는 이 책에 수록된 「문학사회학」을 한국에 소개했었다.
『마르크스주의도 리얼리즘도 인류가 찾고자 하는 환각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루카치가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를 넘고, 근대를 넘어야만 인류의 혼돈이 끝난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근대성은 무엇인가. 그는 자본주의의 양식인 반봉건적 요소가 시작된 시대이자 국권상실이라는 특수성에 놓였던 19세기초가 한국근대문학의 기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한때 한국문학의 근대 기점으로 보았던 18세기 후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한참 거슬러 올라간 어느 시점으로 수정돼야 한다는 말이었다.
『우리 근대문학이 세계사의 조류와 마주쳤던 1925∼35년에 출현했던 카프문학에 주목한다. 딱히 어떤 작품을 기점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대개 그 시기가 되지 않는가 싶다』북한에서도 92년 이후 카프문학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한데 그가 오랜 전공분야였던 카프문학에 새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기연이 아닌가.
『결국 자본주의는 파괴돼야 한다거나 국가는 깨져야 한다거나 하면서 근대가 십자포화를 맞던 시대에 카프문학도 똑같이 십자포화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근대문학은 카프문학에서나 시작하게 될성 싶다』
그는 「사견」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학계에서 정식으로 발표되면 우리 근대문학사는 다시 쓰여야 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나나미가 본 것은 인류의 황금시대였던 고대 그리스문화의 중심지, 로마의 시민권이 20세기의 미국시민권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로마시민성의 문화적 힘에 대한 향수, 즉 「팍스로마나」에 대한 향수인 것이다』 그러나 로마도 미국도 가져보지 못한 우리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는 망원경으로 먼 곳을 들여다 보았다. ＜鄭喆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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