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안과 밖, 시인 주창윤론 I ------------ 이강룡
작품 선독. -- 첫 시집, <물 위를 걷는자 물 밑을 걷는자>의 분석
......가령 지양이 <사이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면
나는 지금 이곳의 그 사이에 서 있고 싶다......
주창윤, <물 위를 걷는자 물 밑을 걷는자> 중에서.
주창윤의 詩作명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틈과 마디를 찾는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성기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었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랴'
어느 시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듯이, '틈과 마디를 지향하는 시인이 어찌 성기완뿐이랴'라는 말로 주창윤론의 서두를 여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평범한 논리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 함민복의 경우를 또다시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번 호는 가능하면 개개 작품의 부분보다는 전문을 실어, 필자에게 주어질 몫을 독자들에게 되도록이면 많이 전가(--;)시키려고 한다. 웹에서의 글쓰기가 그 특수한 상황적 제약에 의해 피치 못하게 인상비평으로 머문다면(ㅜ.ㅜ), 비평이 아닌 '선독'에 그치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물론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의 글읽기를 가정하고 말하는 것이다. 수십 편의 시들 가운데 필자에 의해 선별된 몇 편의 시를 같이 읽는다는 자체가 이미 주창윤 읽기의 正道에서 벗어난 일임은 틀림없으므로 독자들도 나름대로 삐딱한(^^) 관점을 갖고 읽어주길 바란다.
주창윤이 바라보는 삶을 묵묵히 따라가 보는 글읽기란, 이렇듯 '지금 이곳의 그 사이에 서 있고 싶다'라는 화두를 간직한 채로 무작정 시집 첫페이지를 펴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창윤의 경우 그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명제는 '삶에 대한 정의'와 '현대인의 모습에 대한 탐색' 이다.
자기를 밀어내 砂丘를 쌓은 강은 아름답다.
갈대구름은 그곳에서 피어난다.
은어 풀어주기 전에
먼저 젖지 않으므로
천천히 물 위로 나를 밀어내는 저녁 강
나는 가라앉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내어 생을 이룬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녁 강 - 혹은 삶' 전문.
소설가들의 첫 소설은 자전적인 경우가 많다. 반면 시인들의 첫 시집에는 그의 시작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편이 한두 작품은 꼭 있게 마련이다. '저녁 강'은 이를테면 그와 같은 작품이다. '자기를 밀어내 砂丘를 쌓은 강'.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의 인생관을 다음 시 '양파'에서 다시 확인해 본다.
양파껍질을 벗긴다.
한겹씩 지워나가 보면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어 버린 진실도 확인한다.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이
도리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안팎이 같은 양파껍질을 벗기다 보면
알게 된다.
안팎이 같다는 사실이
오히려 두려운 순간 속에서 나는 산다.
안으로 안으로,
양파껍질을 벗겨 들어갈수록
그것들은 모두 밖이 되어 남는다.
생이란 그런 것인가.
그 껍질들이 껍질이기 이전에
안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밖은 밖으로 서 있는 것이고
안은 안으로 앉아 있는 것이리라.
안팎이 하나인 양파껍질을 벗기는 오후
나는 무엇인가에
자꾸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두려워진다.
'양파' 전문.
'흔들림', '혼재', '갈등', 이러한 단어들만으로 '생'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 우리는 '양파'에서 일련의 '머뭇거림'을 감지해낼 수 있다.
저기 저 밤거리의 플라타너스가
두겹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나의
시력 앞에서, 하나의 플라타너
스가 혹은 분명한 하나의 실재
가 (나무의 서 있음이 혹은 역
사적 사실들이) 과거의 실재와
현재의 실재로 분리되어 이중으
로 이중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공간 위에 겹쳐진 서로 다른 시
간 이 분명한 실재성의 흔들림이
나의 난시를 악화시킨다 두겹
으로 서 있기를 멈추지 않는
지금 나의 안경알이 두꺼워진
다.
'난시' 전문.
'이 분명한 실재성의 흔들림'은 시 창작의 원천이며, 또한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시인의 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재성의 흔들림'에 흔들리우는 모습의 이면에는 현대사회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주창윤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라면, 삶 속의 불임성, 그 역설적 상황에 대한 탐색과 성찰이다.
우수 지나 입덧하는 입덧하는 아내의 봄바다
겨우내내 아무것도 낳지 못했던 불임의 봄바다
가장 얇은 외피만을 벗어내는, 외피만이 벗겨지는 역사
입덧 속에서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봄바다
죽은 채로 살아 있다고 살아 있다고 파도치는 봄바다.
'봄바다' 전문.
잉태하지만 생산하지 못하는 불구의 모습으로 현대인들은 그려지고 있다. 결국 우리들의 모습은 끝도 없이 생산을 지향하지만, 상상 임신에 그치는 불임의 바다에 부유하는 존재들인가.
구릉 저편으로 가까이 가면 뒤로 물러서는 밤바다
아이를 밴 그대여.
무엇을 더 게워내야 하는가.
게워내도 게워낸 빈 자리에는
만월로 차오르는 비워낼 수 없는 그리움
바람은 방풍림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아래에서 모래로 쌓인다.
눈 감기듯 멀어지는 저 갈대의 바다
그대여, 무엇을 더 게워내면
입덧이 멈추겠는가.
바다는 깊이 잠들겠는가.
'편지1' 전문.
그의 편지 시편들(15편)은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연작시 형식의 편지 시편들이 일단락 되는 자리에서 잠수교 시편들(3편)이 시작되는데, 두 시편들을 비교하며 인식의 변화를 읽는 것 또한 흥미로운 작업이다.
비내려 만수위를 넘었다.
호우가 아니어도 잠기는 잠수교처럼
나도 무엇인가에 쉽게 정복당하며
살아간다. 잊어버리면서
내일 오후쯤
비 그쳐 강물이 하류로 빠져나가면
잠수교는 그 모습을 드러내겠지.
강북으로 가면서
밤 사이 무엇에 잠겨 우리가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모른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손금마저 지워지고
대답 없이 흔들리는 젖은 갈대풀이
장마기를 살아가는지.
'잠수교3' 전문.
......가령 지양이 <사이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면
나는 지금 이곳의 그 사이에 서 있고 싶다......
첫머리에서 화두처럼 제시한 그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시가 있었다!
령을 사이에 두고
평창은 햇빛이 들고
강릉은 물안개로 젖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 下界
뚜렷이 보인다.
젖어 있는 곳과
젖어 있지 않은 곳
나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중용인가?
대관령을 넘어
강릉 쪽으로 내려가니
물안개 속에서 흰배추나비가 날아오른다.
어디로 날아갈 것인지
길은 안개에 젖어 보이지 않았다.
'대관령' 전문.
시집 <물 위를 걷는자, 물 밑을 걷는자>의 발문에서 남진우는 주창윤의 시세계를 '수평적 시선의 깊어지기'라고 정의한다. 납득할만한 정의다. 하지만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시인이 그토록 되풀이 추구했던 '실재'의 문제에 한번도 흠뻑 취해보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창윤 시의 약점을 굳이 들자면, 그의 시선은 언제나 '수평'과 '관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 주창윤을 그의 두 번째 시집 '옷걸이에 걸린 羊'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물과 바람이 '지는' 곳에서 봄이 열린다.
그 사실을 알지만, '지는' 곳으로 향하는 나
의 발걸음은 자꾸 머뭇거린다.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1998년 立春 주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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