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놀이, 혹은 거울의 시학
-김춘수의 시
박남희 (시인)
김춘수 시인은 끊임없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시인이다. 그는 무의미시라는 난해시로 우리를 불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시론의 테두리 안에 시를 가두어두고 세상에 방목하기를 극히 꺼려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시를 똑바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시론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시사에서 김춘수 시인만큼 자신의 시론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시나 시론을 미워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질적으로 도피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폭력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와 같이, 자신이 갑갑하게 여기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그의 이러한 도피는 자신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도 있다.
시인 자신에게 이러한 복수를 알게 해준 사람은 베르자예프이다. 그는 <지금까지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바야흐로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할 때가 왔다>는 베르자예프의 말에서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찾아간 대상이 ‘처용’, ‘예수’, ‘토스토예프스키’이다. 그는 처용으로부터 무위, 즉 탈이데올로기의 방법을 배우게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무의미 시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는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는 천재시인 이상의 ‘기교’를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간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기교는 일종의 트릭이고 기만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가 마지막으로 가 닿은 허무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무의미의 세계 속에서 초월을 꿈꾸지 않고, 다만 언어적 차원에서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김수영이 온 몸으로 시와 세계를 동시에 밀고 나갔다면, 김춘수는 온 몸으로 기교. 즉 허무를 밀고 나갔을 뿐이다.
그는 이제 허무, 즉 트릭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와 있다. 의미의 세계에서 무의미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온 김춘수의 시적 여정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존재의 놀이이면서 동시에 거울의 시학에 포섭되기도 한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자신의 방패 거울에 비추게 함으로써 물리쳤듯이 김춘수 역시 무의미시라는 거울을 통해서 역사 · 이데올로기 · 폭력이라는 괴물을 물리치려 했던 것이다. 사실 거울 이미지는 김춘수 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초기 시에 나오는 천사도 온 몸이 눈으로 되어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고, 바다도 대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며, 처용이나 예수도 시인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처럼 김춘수의 시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거울이 도처에 깔려있다. 그 거울은 자의식의 거울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 거울이다. 따지고 보면 김춘수시인만큼 존재론적 자의식이 강한 시인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의외로 가볍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질적으로 무거운 관념 건너편의 자유와 순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 시인은 우리 시의 무거움에 존재론적 가벼움을 선사한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2004년 10월13일자 「문학 비틀어보기」란에 실린 청탁원고 입니다.
출처:시산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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