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려수도는 처절한 피의 기억을 품고 있다. 임진년의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강요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다르지 않은, 잿더미 위에 한 영웅이 있었다. 
 남쪽의 아름다운 바다 한려수도는 처절한 피의 기억을 품고 있다. 수천만명의 목숨이 그 바다에서 임진년에 시작된 전쟁으로 사라졌다. 한쪽은 남의 땅을 탐내는 자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자기 땅을 지키려는 자들이었다. 바다는 차디찼고, 현실은 더욱 냉혹했다. 목숨을 잃은 것은 죽은 자였지만 살아남은 자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잿더미 외에 남은 것이 없었다. 거기에 한 영웅이 있었다. 그 영웅 덕에 살아남은 자들은 잿더미라도 움켜잡고 울 수 있었다. 이순신, 칼보다 더 순결한 삶을 살았던 사내. 생과 사를 넘나들던 그의 길을 따라서 여수, 통영, 남해를 더듬어본다.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하리라, 여수
1591년, 조선의 조정이 당파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니, 그렇지 않을 것이니 하며 입씨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전라좌수사로 여수 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은 이미 일본의 대거 침략을 예견하고 많은 배와 거북선을 건조한다.
 이순신이 부임할 무렵 전라좌수영은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 등 다섯 개의 내륙 기지[五官]와 방답, 여도, 시도, 발포, 녹도 등 다섯 개의 해안 기지[五浦]를 지휘했다. 이중에 여도, 시도, 발포, 녹도 등은 지금의 고흥군에 속한 마을이고, 방답은 지금의 여수시 돌산도다. 이 돌산도가 바라보이는 바다 앞에서 이순신은 일본 전함 700여 척이 부산포를 내습하기 하루 전날인 1592년 4월 12일에 거북선에 올라 총통을 시험 발사한다.
지금의 여수시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망마산 자락의 선소(船所)는 임란 당시 이순신이 총지휘선인 판옥선과 거북선을 건조한 곳으로 알려졌다. 둥글게 쌓은 돌담이 바다 쪽으로 열린 이곳에서 결전을 준비하며 수많은 배가 만들어졌으리라. 하지만 500년 세월이 흐른 후 지금 이곳에는 해 질 녘 작은 물고기만이 가벼운 몸을 수면 위로 차고 올랐다가 다시 자맥질을 하며 파문을 만들어낸다. 출정할 때는 살아 있으나 돌아올 때는 그 생을 장담할 수 없었던 선소. 어쩌면 이곳에서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인간으로서의 두려움과, 나라의 병사로 그리고 한 집안의 아비로서 나라와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배를 건조한 것이 아니라, 생 이후의 죽음, 죽음 이후의 생을 건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값진 희생 덕에 지금 저 붉은 백일홍 그늘 아래를 그들의 어린 후손이 껑충껑충 해맑게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이리라.
 임란 발발 바로 전날 이순신이 총통 시험 발사를 했던 돌산도 앞 밤바다, 지금은 총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화염 대신 돌산대교와 뭍을 잇는 돌산대교의 현란한 조명이 수면을 물들인다. 1592년 5월 옥포(거제도)해전을 시작으로 당포(고성)승첩, 한산도대첩 등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이순신이 1957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과 투옥을 거치다가 도원수 권율 휘하에 백의종군하여 8월에 통제사에 재임명되어 돌아온 이 돌산도 앞바다. 이순신은 바다를 보며 “보이는 것이 참담하구나(所見慘然)”라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그해 7월,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 대공세를 편 일본에 의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모두 궤멸되고 뭍이나 바다나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던 것이다. 그 절망적인 잿더미 속에서 이순신은 다시 백성을 일으키고 꺾이지 않는 충정으로 그들과 함께 적과 맞설 힘을 키운다. 그 꺾이지 않는 충정과 기상은 전라좌수영의 본부로 쓰인 현존하는 국내 최대 목조 건물인 진남관(鎭南館)을 받치고 선 예순여덟 개의 거대한 소나무 기둥만으로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통영
 세계 해전사의 한 절정으로 일컬어지는 한산도대첩. 그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통영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남망산 수향정에서 저 멀리 그 옛날 조선 수군의 함성을 듣는다. 수향정 뒤쪽으로는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서 아직도 그 바다를 지키고 있다. 임진년 한산도대첩은 크게 두 개의 싸움으로 나뉜다. 견내량싸움과 안골포싸움이 그것이다. 견내량은 지금의 거제도 하청면 앞바다이고, 안골포는 지금의 진해시 안골동이다. 이순신은 견내량에 숨어 있던 적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끌어내어 쳐부수었다. 이때 수세와 공세, 유인과 섬멸, 도주와 역공, 포위와 역포위의 신속한 전략 전환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이다.
거센 파도처럼 적을 몰아치고 하늘에 쏟아지는 벼락처럼 순식간에 왜선을 침몰시킨 이순신도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라며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라는 시에서 나라의 운명과 부하의 생과 사를 책임져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소회를 깊은 밤바다를 마주하고 이야기한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다. 지금 한산도의 제승당 자리는 이순신이 막료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운주당이 있던 곳이다. 한산도에 있던 본영은 이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영 두룡포로 옮겼다. 두룡포로 옮겨진 본영은 지금의 문화동에 세병관(洗兵館)이라는 객사가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산대첩은 남해안에서 벌어진 국지전이었으나 전쟁 전체의 양상을 바꾸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군은 남해안에서 주도권을 상실했고, 그 결과 보급이 끊기고 퇴로가 막히게 됐다. 일본의 서해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를 지킬 수 있었으며, 반격의 교두보가 마련되었고, 서해를 통한 지휘 계통이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일본군에게 이순신은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이 임금을 향해 쓴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현실에서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공훈을 기려 당시 연합군이었던 명나라의 신종(神宗) 황제가 보낸 군의장물인 명조팔사품이 이순신의 위패를 모셔놓은 충렬사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싸움이 급하니 죽음을 말하지 마라, 남해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지금의 진도대교 바로 아래 울돌목에서 전선 12척으로 330척의 일본 함대와 싸워 크게 이기니, 이것이 명량대첩이다. 이듬해인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른다. 이에 이순신은 수군 진영을 현재의 고흥반도 앞의 고금도로 옮긴다. 철수하는 적의 주력으로 바짝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 500여 척도 고금도로 들어와 이순신 함대와 합류한다. 11월 18일 22시, 조명 연합 함대는 광양만의 장도에서 지금의 남해시 고현면 관음포를 향해 진격한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9시경 이순신은 철수하는 적을, 지금은 남해대교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노량마을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가 일본 저격수의 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아 전사한다. 전사한 이순신의 주검이 배에서 최초로 내려진 남해군 고현면의 관음포 충무공 유허지 입구에는 ‘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마라)’라는 문장이 새겨진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자신의 목숨이 스러져가는 순간에도 나라의 안위를 먼저 헤아린 충무공. 그의 나라를 향한 곧은 절개와 기개는 그의 유허비 뒤쪽을 에워싸고 노량앞바다에서 관음포로 불어오는 해풍을 그대로 견디고 있는 푸른 대나무와 붉은 금강송처럼 푸르고 단단했다.
현재 남해대교 건너 노량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설천면의 한쪽 언덕에는 충무공의 위패와 가묘가 모셔진 충렬사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사당은 충무공의 공훈과 업적에 비하면 턱없이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의 가묘에 그늘을 드리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권좌에 앉아 있었던 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었다는 20m 정도의 히마리야시드라는 나무가 오히려 더 눈에 띌 정도다. 그 대통령의 지휘하에 충무공에 대한 모든 추모와 기념의 흔적이 대부분 아산 현충사로 옮겨진 탓이리라. 따라서 충렬사를 내려오는 계단 앞 바다에 띄워놓은 거북선도 일본 수군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위엄은 찾아보기 힘들다. 철갑 위에 힘없이 내려진 돛이라도 높게 올려 이순신의 드높은 기상이 서린 남해 노량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껏 펄럭이고 부풀게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은 감상에 젖은 철없는 길손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노량앞바다에 떠 있는 그 거북선의 눈은 아직도 500년 전 치열한 전투의 기억으로 노량바다가 석양에 물들 때마다 붉게 타오르고 있으므로.
 [주변 볼거리]
향일암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로 남해 최고의 일출 절경을 볼 수 있다.
무술목 700m 가량 펼쳐진 해안선이 온통 자갈밭이며, 임란 당시 이순신이 천혜의 전략 요충지로 활용한 곳이다.
오동도 약 768m 길이의 방파제로 연결된 아름다운 섬. 194종의 희귀 수목과 기암절벽이 섬 전체를 감싸고 있다.
황리 공룡 발자국 화석 황리교 옆에 서너 평 크기의 암반 위에 남아 있다.
충무교와 통영운하 바닷물 위로 배가, 바다 밑으로 뚫린 해저터널로는 사람이,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충무교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3중 교통로.
금산 온갖 전설을 담은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금강이라 불린다. 예전의 이름인 보광산에서 태조 이성계가 오랜 수도 끝에 왕위에 오르자 고마움의 표시로 비단 금(錦) 자를 써서 이름을 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가천 다랭이마을 남면의 가천마을은 산을 깎고 돌을 쌓아 만든 논이 산 정상 가까이까지 푸른 계단을 만들고 있다.
[주변 먹을거리]
충무김밥 중앙동에는 저마다 원조를 자처하는 충무김밥집이 늘어서 있다. 뚱보할매김밥집이 유명하다. 1인분 3500원. 055-645-2619
갈치회무침 남해군 최남단 3번 국도가 시작되는 미조항에서는 갓 잡아올린 갈치와 멸치로 만든 회무침을 맛볼 수 있다. 쉽게 죽는 생선의 성질 탓에 도시에서는 여간해서 먹기 힘든 갈치회와 멸치회 음식점은 그래서 아는 사람들이라면 남해를 찾을 때마다 꼭 찾는 필수 코스다. 미조항 위판장 옆에 있는 공주식당이 유명하다. 회무침 한 접시 2만원. 055-867-6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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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격전의 현장을 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