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만든 그림엽서
―문효치,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
류재엽
길은 우리 인간들이 다님으로써 생겨나고, 한편으로는 길이 생겨남으로써 우리들은 그 길을 따라 다니게 된다. 길은 다른 곳으로의 연결 통로이면서 미지의 세계를 열어주는 하나의 열쇠이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자연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정과 문화, 그리고 새로운 역사와 전설이 우리를 맞이한다.
여유 있는 마음과 시간을 가진 채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로에서 느끼는 것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낯선 것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에는 눈의 호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음의 호사에서 오는 것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은 바로 우리에게 마음의 호사를 전해주는 책이다. 그것은 그의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누군가 세계는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이 책 속에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사연이 무궁무진 가득하다. 나의 떠돌음은 이 거대한 책의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어나가는 일이다. 한 장을 넘기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고 또 한 장을 넘기면 또 신기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 나는 이 책장 읽어넘기를 그칠 수 없다.
이렇듯 세상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실은 내 경험의 축적이요 삶의 질량이다. 그곳에 있는 과거사, 그곳에 있는 사람들, 그곳에 있는 자연과 풍광, 그것들이 어울어져 빚어내는 소중한 사연들이 아무리 채굴해도 계속 캐어져 나오는 광맥같이 이어져 나오는 한 나는 이 떠돌음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의 호사를 위해 책장 넘기기를 마다 않으려는 시인에게 있어 여행이란 아름다운 여성의 은근한 유혹보다도 더욱 마음을 끄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행의 유혹이 시인에게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효치 시인의 발길은 전국 곳곳에 자취를 남긴다. 그 자취는 단순히 그곳에 가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왔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과 예술을 만난다. 그 만남은 시간을 뛰어 넘어 단지 어느 동일한 장소에 서 있다는 공통점과 함께 아울러 시를 사랑하고 예술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는 동류의식에서 비롯된다. 시인이 만난 이는 적지 않다. 그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고자 했던 아픔을 지닌 이들이었다. 문효치 시인은 그들의 아픔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문학혼을 일깨우고 싶어한다.
시인은 바다 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남국의 서귀포에서 이중섭을 만난다.
화가 이중섭은 한때 여기에 와서 살았다. 꿈같은 고장 서귀포에서 이중섭은 행복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평남 평원군 출신인 그가 여기에 온 것은 1951년 1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였다. 그는 이곳 주민의 호의로 방 한 칸을 얻어 살 수 있었으나 2평도 못되는 작은 방에서 네 식구가 기거를 했으며 그는 전혀 생활능력이 없는 대책 없는 가장일 뿐이었다. 나라 전체가 온통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제주도는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이러니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춥고 배고픈 한 해를 여기서 보내면서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로움은 배고픔보다 더 컸다.
―「서귀포, 이중섭의 영혼의 고향」에서
그러나 서귀포는 그저 이중섭이 잠시 살다 떠나가 버린 고장이 아니다. 화가는 가족들과 떨어져 외로움 가운데 살면서도 창작에 몰두하여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그리운 제주도 풍경」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서귀포는 “우리의 불행한 한 시대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다간 화가가 살았던 고장이요, 그의 예술혼이 펼쳐진 무대”이기 때문에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시인의 가슴에 더욱 절실한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에 등장하는 고장은 시인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곳이다. 정약전과 최익현의 유배지 흑산도를 비롯하여 윤선도의 이상향 보길도, 천형의 아픔을 간직한 소록도, 노향림의 시비가 서 있는 압해도, 원효대사의 향일암, 퇴계와 이육사의 고향 안동, 추사의 고택이 있는 예산, 허균과 난설헌의 강릉, 정지용의 「향수」를 떠올릴 수 있는 옥천 등지가 바로 그곳으로,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은 단지 어떤 이름난 명승지거나 고적이 자리한 곳이 아니라 시인의 문학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다음의 글을 보면 그것은 한층 뚜렷해진다.
소나무는 변덕이 없고 절의가 깊어 배신을 모른다. 그래서 윤선도는 소나무를 벗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를 벗삼은 자가 어찌 윤선도뿐이더냐. 우리의 조상은 모두가 소나무를 벗삼고 숭상해왔다. 소나무는 약재로 목재로 음식으로 화목으로 쓰며 우리를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시, 그림, 도예의 소재가 되어 민족 정서 순화에 큰 몫을 했다. 이런 토종 소나무 적송의 큰 밭이 여기에 있음으로 우리의 안면도 여행은 마냥 즐거운 것이다.
―「한반도의 귀고리 안면도」에서
안면도에서 시인을 반긴 건 불타는 듯한 저녁노을이나, 백사장 포구의 먹거리가 아니라 바로 우거진 안면송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하늘을 찌를 듯 자란 안면송을 보고 “네 손을 잡고/ 장승업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파랗게 쌓여 있는/ 두꺼운 시간의 덩이들이 녹아흘러/ 시내를 이룬다/ 가서, 나도 그 옆에 솔이 된다.” 라고 읊었다. 안면송을 매개로 하여 화가 장승업, 시인 문효치, 안면송이 일체가 된다. 장승업이 곧 안면송이요, 안면송이 시인이요, 시인이 바로 장승업이다.
시인이 좋아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선비 정신으로 무장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이들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으면 절대 타협을 않는 이들의 선비 정신이 바로 시인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도끼를 허리에 차고 대궐 앞에 나아가 상소를 올린 최익현이 그러했고, 잘못된 조선의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다 실패한 허균이 그러하였으며, 「세한도」를 통해 모름지기 선비의 기개를 드러낸 명필 김정희가 그런 선비 정신을 갖춘 인물이다. 시인은 그들의 고장을 순례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닮고자 한다. 또 그들이 되고자 노력한다.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훤소한 도심에서 탈출하고픈 몸짓인지도 모른다. 그런 시인의 마음은 책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우포늪에 오면 나도, 아웅다웅하던 내 이웃도, 모두 대자연의 한 품에 품어져 있는 한 가족임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미움도 갈등도 모두 저 갈숲의 맑은 휘파람소리에 날려 버리고 영혼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인생을 ‘외할머니 논두렁길 낯익은 추억 따라 가듯’ ‘소풍가는 기분’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과제가 있다. 이러한 우포늪을 어떻게 지켜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일부분이긴 하지만 벌써 병, 스티로폼, 기타 생활폐품 등의 쓰레기가 떠 있는 곳이 있다. ‘푸른 우포늪 사람들’이 그 파수꾼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장한 사람들이다.
―「물의 나라 창녕 우포늪」에서
자연을 마주하고 서 있으면 이미 미워할 만한 존재는 사라지고 없다. 마음이 자연을 닮는 까닭이다. 그래서 깨끗하게 보존된 자연은 우리에게 영혼의 안식을 준다. 자연을 닮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은 이미 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자연과 시인의 마음은 서로 일치하고, 시인은 자연의 비밀스런 소리를 듣는다.
남한산성 성벽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번져 있다. 숲에서는 푸르른 빛깔과 함께 솔향기가 떠돌고 저 숲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은 우리의 청각을 가장 감미롭게 해주는 음악 소리를 끊임없이 빚어내고 있다. 음풍영월의 고전적 취향으로 한껏 여유를 잡고 흐르는 세월을 붙들어 앞에 조아려 놓고 복닦거리는 도심에서 잠시 벗어나 낭만의 정회를 풀어헤쳐 볼 만한 곳, 남한산성은 서울을 비롯한 성남, 광주, 하남 등 수도권 시민들의 매우 좋은 소풍지이다.
―「남한산성을 거닐며」에서
자연은 상징의 집합체이다. ‘자연은 곧 사원’이라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징적 의미체인 현상의 드러난 존재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속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자연은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우친다.
바닷물에 젖은
어둠이
내 살 속에 들어와 있던
물새 한 마리
지우고 있다.
내 뇌 속에 고여 있던
종소리 한 떨기
내 피 속에 섞여 있던
햇빛 한 다발
내 뼈 속에 짓고 있던
절 한 채 지우고 있다
바닷물에 젖은
걸쭉한 어둠이
내 속을 걸어다니며
저기 아득한 시간
그 바깥의 머나먼 나라로
나를 밀어내고 있다
―문효치, 「망해사 밤」
시인은 망해사에서 선유도를 바라보며 지은 이 시에 대한 느낌을 “어둠이 밀려오면 하루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또 지워버린다. 다음날을 새롭게 맞기 위한 준비다. 어둠 속에서 내 자신도 지워버린다. 내일의 새로운 나를 위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고 자연과 동화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발간 이후 많은 여행서들이 나왔다. 그러나 시인 문효치의 여행기처럼 그곳에 가서 옛 인물을 만나고, 거기에서 시의 영감을 얻는 과정을 서술한 여행기는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졌을 때 우리가 받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 마디로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은 이 책의 전편격인 『시가 있는 길』과 더불어 시인의 향기와 시의 향기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신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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