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시
정동진역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끌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않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정동진에 가 본 적이 없다. 드라마 '모래시계'도 거의 못 보았다. 단지 그 드라마를 쓴 작가 송지나가 이 곳 성산포 옆 세화고등학교를 잠깐 다녔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도 강원도에 산 적이 있다. 초등학교 6년간 원주 변두리에 살았었는데 철길과 논길을 따라 학교엘 오갔다. 이따금 철로에 몸을 던져 죽은 사람의 잔해도 보곤 했다. 원주역은 컸다. "여기는 원주, 원주,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 없이..."라는 아나운스멘트도 컸고 역전 광장도 컸다. 원주역만 지나면 최진실이 나오는 영화 '편지'처럼 자그만 건물의 간이역이 이어졌다.
시집 '정동진역'이 나와 한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나는 이곳에 온 그를 만났다. '다층'이 주관하는 '한일시인100인선'의 출판기념회 자리였는데 심각하지 않은 그의 면모가 꼭 그의 시집 '정동진역'의 분위기 같았다. 그는 이 시를 정동진에 한 번도 가 보지 않고 썼다고 했다. 어느 날 경향신문의 'x-파일'난에 정동진역의 사진과 소개의 글이 크게 실렸는데 그걸 보고 단번에 썼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시에서의 '체험'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렇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도 멋들어진 시를 쓸 수가 있구나.
그는 경제학과를 다녔다. 기형도의 정외과와 함께 문학과 대척에 있는 이 전공은 문학 전공의 시인들을 무색하게 한다. 샘이 난다. 남들은 4년을 죽게 다니고도 시를 별반 잘 쓰지 못하는데 경제학과를 다니고도 이렇게 시를 잘 쓴다면 꼭 문학을 전공할 필요가 없겠다. 사실 시를 쓰는 데 학교가 무슨 필요냐. 시 쓰는 건 학교 같은 데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치열히 고민하며 쓰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냐.
이즈음 이 곳 성산읍의 '섭지코지'도 TV드라마 '올인'으로 하여 그 정동진역처럼 '뜨고' 있다. 관광객들이 연일 들이닥치고 있다.
제주도의 정해진 관광 코스가 아닌, 한 뼘 바다 너머 성산 일출봉이 바로 보이는 그 곳에 처음 간 때가 1992년이었을 게다. J기획의 젊은 팀들 서너 명이 카메라를 들고 내려왔는데 그 옆에 내 시가 몇 줄 나오는 대한항공 광고였다. 유명 시인이 아니어서 대우는 볼 것 없었지만 섭지코지와 가까워 진 것이 득이었다. 화가 K형의 감탄을 자주 들으면서 그 곳에 한 번 가 보려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수업을 오전으로 올리고 제주시에서 한 시간 반은 걸리는 그 섭지코지를 삼 일간 드나들었다. 바닷가에 앉아 폼만 잡으면 됐지만 그 '몇십 초'를 위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촬영의 곤혹을 섭지코지의 맑은 해풍이 그나마 씻어 주었다. 관광객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 섭지코지도 이젠 유명해 져서 '올인'의 촬영이 끝나자 셋트를 치우느니 보존하느니 시끄럽다. 그랬다. 나는 섭지코지가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내 마음 속에 그 넓은 들판과 아름다운 바다를 혼자 담아 두고 싶었다.
허나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정동진역'에 대해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가 있었으리라. 아니 이 땅에는 그런 곳이 무수히 많다.
시 '정동진역'은 참 그럴싸한 시다. 특히 '해안선을 잡아넣고 끌이는 라면집',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 등의 구절은 얼마나 감칠맛 나는 시각적 이미지인가. 나는 경제학도였던 그가 이렇게 시를 잘 쓰는 게 얄밉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을 보내왔다. 첫 시집처럼 그의 번득이는 재기가 편편에서 빛을 발한다. 허나 좀 더 있다가 내었다면 하는 생각도 든다. 첫 시집과의 변별성이 떨어진다.
오늘 나는 다시 시집 '정동진역'을 펼친다. 그 무렵 가슴 찰랑이며 시를 얘기하던 '포세이돈'이 시집 위에 겹쳐진다. 수련 한 송이 눈망울에 맺힌다.
* 김영남(1957-) 전남 장흥 출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윤동주문학상, 지난 계절의 우수 작품상(다층)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사무처 근무. 시집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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