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시
바다에 누워
박해수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는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간다
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抛物(기물)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뭇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시퍼렇게 흘러간다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될까
물살이 퍼져감은
萬象을 안고가듯 아물거린다
마음도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脈이 실려간다
나는 無心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내게 '바다'는 무엇이었나. 바다를 처음 본 건 부산에서였다. 열두 살 때, 원주에서 중앙선 열차에 몸을 싣고 아버지의 잠잠한 안경을 따라 열차의 창가에서 뭣 모르게 신문지를 찢어 날리며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부산역의 네온은 찬란했다.
다음 날 바다가 집 아래에 와 찰랑이는 자갈치 시장 어떤 집으로 갔다. 아버지와 사업상 관계가 있었던 분의 집이었다. 거기서 처음 바다를 보았다. 매쾌한 생선 냄새와 고깃배들, 화물선의 내음이 코를 울렸다. 후각이 그렇게 강하게 움직인 것은 처음이었다.
부산에서 바라보는 남쪽 바다는 오륙도를 거쳐 미지의 것이었다. 몇 달 후 배를 타고 다시 제주로 갔을 때 바다는 드디어 그 실체를 내게 드러냈다. 밤의 열두 시간이 지나니 아침이었고 큰 섬이 나타났다.
그 후 '바다'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박해수의 '바다에 누워'는 당시 '한국문학' 신인상 당선 작품이었다. 이 시를 보니 '바다'가 비로서 보이는 것 같았다.. '바다에 누워'라는 제목은 내게 '바다'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아, 바다에 누울 수가 있구나. '바다'는 단지 '바다'가 아닌 것이었다. '바다'는 상징이었다. '바다'는 자유였다. '바다'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바다'에 눕자. 그러자. '바다'가 있다.
이 시를 통해 먼 바다도 내게 다가왔다. 시를 읽으면 바다는 참으로 고즈넉히 나를 감싸고 위무해 주는 그런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영국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나는 아무래도 바다에 가야겠구나. 외로운 그 바다, 하늘로./내게 필요한 건 단지 높다란 배 한 척, 방향 잡을 별 하나,...'의 '바다에 몸이 달아'도 떠올랐다. 그는 열여섯 살에 배를 탄 후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이제 내 시의 옆에는 새로이 '바다'가 자리했다. '바다에 누워'에 촉발하여 다음과 같은 시도 썼다.
'산 위에 누워/ 담배를 피운다/ 아직 한낮인데도/ 어둠 속에/ 누가 걸어오고 있다// 한 몇 년 전부터/ 누가 걸어오고 있다/ 갈대 숲인가/ 혹은/ 흔들리는 항가새꽃 새로// 고개 들면/ 누가 저기 와 섰다/ 누가 와서/ 저 냇물을 눈에 담고 있을까// 산 위에 누우니/ 누가 나를 부른다/ 냇가로 내려가 나는/ 포르르 새가 된/ 우리들의 기다림과 만난다// 산 아래 앉아/ 냇물을 바라본다/ 누가 띄운 종이배일까/ 개미 한 마리 앉아있다' (졸시' 산 위에 누워')
말라르메의 바다, 고은의 바다, 정지용의 바다. '바다'는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비로소 한국현대시에 편입되었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붙이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엘쓴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는 연잎인양 오므라들고.... 펴고....' (정지용, '바다9')
제주는 바로 그 일본과 비슷한 거리에 있는 또 다른 땅이었다. 그리하여 제주는 일본과는 달리 이 곳을 오갔던 시인들에게 다른' 바다'를 태어나게 했다.
그 때 우리가 살던 조천읍 신촌리는 제주시에서 버스로 이십 분쯤 가면 있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신촌 포구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광경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포구 방파제의 망루에서 보면 바다가 멀리까지 보였다. 현무암의 시커멓고 사나운 돌로 이루어진 바닷가였다. 물이 들고 나가는 것을 매일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누워 가랑잎 같은 배에 몸을 실어 이 세상의 어디고 끝없이 흘러가고 싶기도 했다. '바다 위 배에 누워'가 '바다에 누워'로 줄어들었을 때의 그 함축의 매력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렇게 그렇게 '이승의 끝'까지 흘러가 버리고도 싶었다.
* 박해수(1948∼) 대구 출생. 영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당선. '자유시' 동인. 시집 '바다에 누워'(1980), '서 있는 바다'(1986), '걸어서 하늘까지'(1989) 등. 현 대구금속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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