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조선신춘평론>
사실성의 투시와 견인 / 오규원론
최현식
앞의 세계가 잘 드러난 시들이 속물적 도시공간을 다룬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와, 그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의 불모성을 파헤친 「거리의 시간」, 「1991˙10˙10,10:10∼10:11」 등이다. 이 시들에 동원되는 환유적 사실들은 익명화-파편화된 도시적 삶의 무상성에 관한 비판적 성찰과 관련된다. 이 시들에서 시적 자아는 대상들을 냉엄한 관찰자의 시선을 통해 사실적으로 진술할 뿐, 그에 대한 가치판단에는 무관심한 체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도시의 일상적 삶이 내포하는 허위성을 고발하려는 고도의 지적 전략이다. 즉 「대방동…」에서는 도시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세목들과 그 수치의 나열, 그것들이 위치하고 있는 은행명의 구체적 제시 등을 통해 이 무관심이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핵심적인 동사 ‘반짝입니다’가 산출하는 이질적인 정서효과를 통해서도 그 전략이 구체화된다. 시적 자아는 햇빛에 의해 반짝이는 현상과 비가 오는 날임에도 인위적 행위인 선팅 때문에 반짝이는 현상을 대비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반짝임의 이질성을 통해 허상적 이미지가 사물의 본질을 집어삼키는 현대적 삶의 물신적 논리를 발견하고 있다. 이와 달리 ‘거리산책자’ 모티브가 채용된 「거리의 시간」, 「1991˙10˙10,10:10∼10:11」 등에서 그는, 거리(일상)의 흘러가는 시간과 그것을 지연시키려는 시적 자아의 내면적 시간의 대비, 즉 <시간 잘라내기>를 통해 현대적 삶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거리의 시간」에서는 그로테스크하게 희화화된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익명의 남녀들이 트럭에 의해 ‘썩썩’ 뭉개지는 장면을 냉담하고 무미건조하게 차례로 묘사함으로써 그것들의 역겨움과 전율스러움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를 통해 그는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 삶의 무의미성 등이 우리 삶의 본질적 국면의 하나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현대적 삶의 이러한 불모성을 반성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감동(반성-인용자)할 시간’을 캐내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어’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한다. 그것의 구체화된 방법이 그 정황으로 보아 거의 동시에 발생한 것임에 분명한 위에 예시된 일련의 사태를 하나하나 해체해 연상적 국면으로 재구성하여 시간의 지연을 감행하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 일상적 시간의 속도성과 비인간성은 그것이 사실적 언어로 재현되는 동안의 시간의 순차적 지연에 의해 그 본질을 드러내게 되고 반성될 계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병적 증후로서의 ‘날 이미지’는 세계를 여전히 인간중심으로 파악하는 시선의 한 변형이라는 점에서 그에게는 또다시 반성의 대상이 된다. 이때 그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존재의 시간적 생성>을 기록할 수 있는, 관념의 허위성을 털어버린 교감의 언어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우선 살아있음의 활력이 충만한 자연현상 또는 그것과 연관있는 인간사의 현상들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은 「소년과 나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의 핵심은 하늘의 세계에 속한 나무와 합일하기 위해 그것을 끌어 안지만, 궁극적으로 앞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햇빛조차도 방해자(벽)로 인식하게 되는 소년의 행위에 스며있는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이런 소년(곧 시인)의 운명의 슬픈 표정을 지우기 위해서는 현상 자체내의 대립적 요소를 지울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행위가 요청되는 바, 오규원은 사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을 바꾸는 방법으로 나아간다. 이 방법은 그의 현재의 시적 방법론을 요약한 것이나 다름없는 「안락의자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시적 자아는 안락의자에 대한 시를 쓰는 자신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편견’과 ‘관념적 세계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의 서술을 통해 반성한다. 그 결과 시인은,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안락의자의 시를 보고 있다>에서 보듯이 시의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적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일반적인 시적 관념에 대한 메타적 반성인 동시에 ‘상상하다’란 동사의 주어를 시적 대상(현상)의 그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욕망의 소산이다. 이런 욕망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커다란 줄기로 갈라져 구체화된다. 우선 「민화(민화)」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연작에서 보듯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원근법적 화폭(시선) 대신 가까이 있는 것이든 멀리 있는 것이든 동일한 지평 위에 펼쳐놓고 바라보려는 우리 시각의 성질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의거한다면, 나비의 더듬이가 하늘을 말아올리거나, 그로 인해 아파트 건물이 나비쪽으로 ‘기우뚱’하는 것은 얼마든지 진실이 된다. 이런 방법에 의해 현상(사물)은 인간의 시각에 의해 소외되거나 대상화되지 않고 그것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인간과 동등한 주체가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눈에 비치는 현상들의 물리적 사실만을 투시하고 기록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존재의 생성을 말하는 <살아있는(생) 언어>에 이르고자 한다. 이런 욕망이 투사된 시들에서는 살아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시적 이미지들로 길, 벽, 하늘, 나무 등이 채용되고 있다. 이는 이것들이 존재의 안팎을 구분짓는 고착화된 사유를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생성의 내밀하고도 역동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입구」는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는 ‘들렸다’, ‘올라가 본’, ‘생겨 있다’ 등의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와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잎의 무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의 시선은 서로 다른 나무들을 관찰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나무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가지가 ‘들렸다’에서 그 가지를 따라 잎이 ‘올라가 보다’와 같이 순차적으로 위로 이동하는 시선은 나무들이 생명력의 절정상태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과, 그 절정이 내포한 미래의 현상일 죽음까지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잎의 무덤’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뭇가지 끝에 생겨남으로써 소멸과 생성을 가로지르는 존재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이런 투시적 상상력은 폐쇄적 인공구조물인 집조차도 <창을 통해 / 밖으로 나>(「안과 밖」)오거나 혹은 뾰족하던 그것이 <둥글게 공기 속에 있>(「횔덜린의 그 집」)게 되는 자기 개방적 구조물로 질적 비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단순히 말해지는 ‘무엇’의 새로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킬 때만이 다음 시를 쓸 수 있다는 ‘시의 모반’(김수영)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 이를 통해 그는 위에서 본대로 자기시의 갱신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에 대한 또다른 반성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즉 그는 우리시에 유행이 되다시피한 대다수의 생태주의 시와 정신주의 시의 또 다른 맹목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들 시의 대다수는 일상적 현실의 불모성에 대한 냉정한 관찰 및 그 표현으로부터 자기 시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모색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초월적 세계와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통해 현실에서의 패배를 보상받으려는 대체주의적 사고와 자기위안의 욕구에 긴박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앞서 본대로 오규원은 시적 언어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냉엄한 인식 속에서, 자연이 그 존재의미를 스스로 말하도록 하여 자기목적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시 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연 및 우리 삶 속에서 순결한 언어를 불러내려는 현대시인의 진정한 대화적 자세가 아닐까.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이래로, 오규원은 언어와 세계(사물)의 진정한 일치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라는 일관된 질문 아래 시를 써 왔다. 최근 그는 이를 위해 진리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고, 그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우리 시대의 순수시(순수시)」)면서까지 사물의 새로운 의미 발견을 위해 주목해왔던 은유적 언어체계 대신 환유적 언어체계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인식방법 전환의 핵심에는 전자가 세계를 하나의 정해진 의미로 개념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즉 전자가 사물의 사실성보다는 관념적인 의미를 우위에 놓고 그 의미를 특권화하기 때문에, 세계를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사고체계 속에 가둘 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구체적인 사물을 동일한 수준의 지시대상과 연관시켜 세계를 경험적이며 수평적(변별적)으로 파악하게 하고, 사물의 물질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체계인 후자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는 후자에 토대한 시 쓰기를 통해, 그것에 의해 표현된 ‘환유적 사실’ 또는 현상들이 <존재의 살아있는 의미망-날(생) 이미지> 자체가 되는 시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적 상상력의 전환을 우리는 ‘이미지의 현행성(현행성)’을 실현함으로써, 개념화될 때 오히려 의미의 결핍으로 떨어지는 사물의 본질을 살려 내려는 언어의 모험이라 칭할 수 있겠다. 최근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가 그런 노력의 결실일 터인데, 이 시집 안에는 다음과 같은 미묘하면서도 상당한 편차를 지닌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즉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환유적 언어체계에 바탕한 ‘날(생)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 세계는 ‘사실들의 사실성과 허위성’을 가려내는 작업에, 또 한 세계는 그 과정을 거쳐 허위성을 탈각한 사물의 이미지가 시적 자아와 교감하면서 만들어 내는 조화로운 통일성의 세계를 모색하는 일에 관련되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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