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의 갈피에 선 시인 - 이승하
'인쇄매체, 멀티미디어에 <白旗>' 이것은 중앙일보 1994년 10월 8일자 15면 기사의 제목이다. 신문 상단을 거의 다 차지하며 실린 기사는 세계 최대의 서적 전시회인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가 책의 종말을 운운할 정도로 책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마당이라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CD-롬과 CD-I 등 멀티미디어가 전문 학문 분야·관광·섹스물·요리·종교·스포츠는 물론 고전문학으로까지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어 2000년이면 멀티미디어의 출판 시장 점유율은 18% 정도로 치솟을 것이라는 기사 내용은 커다란 충격을 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티미디어는 글·영상·소리·애니메이션 등을 한꺼번에 담고 있어 일견 근사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독서 인구를 끌어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되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출판 시장을 주도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하므로 이는 그 누구보다 이 땅의 시인들이 경악할 일이다. 시인들이 70∼80년대의 영화에 젖어 있는 동안 시의 시대는 가고 있었고, 활자문화는 화려한 영상문화에게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자출판의 양적·질적 성장을 봐도 인쇄매체의 황혼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시는 서사적 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와 비디오가 위세를 떨치는 영상의 시대에 그 위상이 나날이 위축되고 있다. 자, 그런데 오늘날의 시인들은 노도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 어느 정도 대응하고 있는가. 대응은 고사하고 적응이라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합당한 시인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도 이 땅의 많은 시인·비평가는 1930년대에 진면목을 보여준 순수서정의 세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거대한 빌딩의 한 방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렇기에 더욱 자연과의 친화와 합일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다. 그 파괴의 과정과 양상 및 파괴자는 살펴보지 않고 막연히 자연과의 하나됨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다면 공허한 관념의 유희로 끝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인쇄매체의 시대가 신문의 보도대로 정말 가고 있다면, 본격문학 내지 순수문학의 시대가 정말로 저물고 있다면, 가장 먼저 버림받는 신세가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어느덧 존립의 문제, 생존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집 베스트셀러는 우리 나라만의 기현상이라고 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만큼 우리 시문학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소설문학마저 서구에서처럼 추리소설이니 환타지 물이니 공상과학소설이니 하는 대중소설에 독자를 최다 빼앗기고 있는데, 시는 이제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나 독자군 형성에 있어서나 임포텐츠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시집은 대학 출판부에서 한정판으로 찍어 동호인끼리나 돌려보는 서구의 경우처럼 회생 불가능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러한 비상시국에 출간된 김요일의 장시 {붉은 기호등}(문학세계사)은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1990년대에 등단한 30대 시인의 첫 시집 {붉은 기호등}의 표지는 십자가상이고, 제일 아래 사지은 시인의 초상이다. 11장의 사진 중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한가운데에 위치한 눈동자(이 눈동자는 제일 뒤 표지에 칼라로 확대되어 있다)인데, 이는 시 본문에서 거듭 강조되는 '나는 본다'는 명제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남성기 모양의 루즈를 바르고 있는 여인의 붉은 입술, 해골, 벌거벗은 남자 무용수의 도약,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인의 무릎과 발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등 사진들은 대개 상당히 자극적이다. 이렇게 사진을 동원하여 표지를 장식하는 시도는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게 될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하는데, 시집 외양의 특성은 이것만이 아니다. 검정 바탕에 빨간 색으로 제목을 쓴 것도 이채롭고, 표지 전체가 흑·백·적의 삼색으로 이루어진 것도 이색적이다. 그러나 제목 위와 책등에 '낯선 경험, 새로운 충격ㅡ제3의 시·3'이라는 선전 문구를 집어넣은 것은 책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시각적인 효과에 신경을 많이 슨 표지는 그러나 다음 4행의 글이 사진들 사이에 적혀 있어 새삼 눈길을 끈다.
껍질을벗긴다 모든
길들여진것의껍질은 아름답지않다벗겨야한
나는내삶속에길들여진내삶이부위만을잘라던진다
나는몹시겁이난다나는선언을하는것인가?
그의온몸에는수백수천의기호가, 화살처럼죽창처럼꽂혀있다
이것은 이 시집의 발간 의도, 즉 주제를 압축해놓은 글이라고 여겨진다. 길들여진 모든 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의 정신을 시인은 표지에서부터 선언해놓지만 곧바로 겁이 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겁만 먹고 아무 시도도 해보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겠노라는 다짐이 이 4행의 글 안에는 숨어 있다. 그렇다. 전인미답의 영토를 찾아 떠나면서 어찌 일말의 두려움이 없을 것인가. 수백 수천의 기호가 화살처럼, 죽창처럼 꽂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이 없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시인의 항해가 시작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이 시집에는 쉼표와 느낌표와 물음표 이외의 기호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의 '기호등'은 신호·신호등의 잦은 등장으로 미루어 '신호등'의 뜻으로 쓴 것이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는 않다고 본다. 어쨌거나 신호등을 보아야 사람은 길을 건널 수 있고, 차는 달릴 수 있다.
김요일의 충실한 실험정신은 시집 본문을 펼쳐들면 더욱 볼 만하게 전개된다. 대개 왼쪽 면은 글자 없이 까만 바탕이고, 오른쪽 면은 시의 본문이다. 하지만 양쪽 면 모두 까만 바탕인 경우도 있고, 활자가 있어야 할 흰색 지면에 글자가 없을 경우도 있으며, 까만 바탕에 흰색 글씨가 있기도 해 시집 전체가 무척 혼란스럽다. 혼란은 띄어쓰기의 무시로도 가중되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활자의 진행을 마음내키는 대로 끊어놓는 데서도 가중된다. 또한 큰 활자가 수시로 등장하여 의식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식의 실험은 시각적인 효과 이외에도 의식의 파편화, 대화의 단절, 현대인의 정신분열증, 인간 소외 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한 면 예를 든다.
이날때가있다너무나외로운그는생각을한다-꿈꾸기-이제그가오고
있다-꿈꾸기-그가지나간다나는그를본다
이모든것은사랑이다죄악이다사랑이다죄악이다
본다
항상똑같은출발이계속된다 나는늘낯설고싶어했다
혁명그것은
황혼은아주짧다 낯선 것
내기억속에는자유를찾아걷던
많은길들과
다떨어진,해진
낡은신발뿐 낯선것이란없다늘쓸쓸했다
날잡으려마라
하늘엔새가떠돌고또래의별들끼리모여송알대는
이렇듯 책의 지면과 활자를 조종하여 다종의 실험을 행함으로써 형태적인 면에서 반시(反詩) 내지는 비시(非詩)의 효과를 십분 연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상의 과격한 실험이 내용과 부합되지 않을 때, 이 작업은 화려한 연출 뒤의 실패작이라는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시의 내용을 검토해보는데, 이 시집에 대한 몇 가지의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동원하겠다.
1. 왜 '본다'를 강조하는가?
표지 앞뒤의 눈동자 사진은 독자를 노려보고 있는 듯하다. "나(시인)는 당신을 노려보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독자)도 나를 노려보시오." 시인은 이런 말을 하고 싶어한 것인지 모른다. 시집 본문에도 "나는본다" "본다" "나는, 본다"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특별히 굵은 활자로 써 독자의 시선이 이 말에 집중되기를 원하고 있다. 시인의 왜 이렇게 '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가? 그것은 보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이 옳다고 생각한 탓이 아닐까. 기실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과 비디오, 컴퓨터와 만화영화 등 화려한 영상매체로 교육을 받으므로 그에 걸맞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된다. 즉 영상의 순간성·동시성·직접성·감성적 반응 등을 선호하게 된다. 이제는 그 누구도 침침한 방에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꿈을 키우고, 감수성을 개발하고, 세계를 보는 눈을 갖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 시각적 효과가 이렇게 강조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한테 들은 것은 믿기 어렵고, 직접 본 것만을 믿고 싶어하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그 자신부터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문화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은 크다. 대학생 이영호(23) 군은 "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라고 여기듯이 우리 세대는 텔레비전을 엄마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고 지적했다. 사람들의 행동·말투·사고방식·생활양식을 거의 텔레비전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94년 8월 어느 신문에서 우리 신드롬의 하나로 영상문화 열풍 현상을 거론하면서 쓴 기사의 일부이다. 아닌게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을 통해 모국어와 외국어를 배우고, 노랫말과 유행어를 익힌 신세대의 뇌리에 텔레비전은 어머니로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도 "TV앞에앉아그녀는쿡쿡제삶을눌러댄다"느니, "난TV없인살수없어" 같은 구절이 나와 '본다'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사물을 유심히 보는 자(見者)만이 사물의 이면까지 보아낼 수 있고,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시인의 시론이 집중되어 있는 동사가 바로 '본다'이다. 이 시집에서 뛰어난 비유와 상징은 모두 견자의 세심한 관찰력에 힘입고 있다. 그래서 장면 전환이 빠르고 원색 색상이 많이 등장한다. 사고의 전개보다는 행위의 장면 진행이 더 자주 눈에 뜨인다. '읽는다'기보다는 '본다'는 의미에서 {붉은 신호등}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시집의 좌표를 훌륭히 설정해준 셈이다.
2. 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가?
"길들여진것들의껍질은 아름답지않다벗겨야한"다는 표지의 구절(표지의 4행은 모두 본문에 다시 등장한다)이 뜻하는 것은 간단하다. 기성의 권위, 기성시인의 어투, 기성세대의 의식 등 이미 이루어진 모든 것들에 길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런데 비슷한 뜻으로 "나는늘낯설고싶어했다"나 "보수적인것은퇴폐적인것이다"까지 표방한 거부의 의사가 그렇게 절박하게 와 닿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판의 대상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적인 것은 다 퇴폐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보수적인 것'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면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존체제가 불러일으킨 거부의 정신이라면 기존체제의 부당함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상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행하는, 길들여진 것들에 대한 무조건의 거부는 거부하는 당사자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반성이 없는 반항은 스스로 절망의 무덤을 파는 행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내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떠올린 것은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제임스 딘 주연 영화의 제목이었다. 이유 없는 반항은 젊은이의 특권이니 그것을 인정해주고 봐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는 그 누구도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집은 언어와 의식 양면에서 우리의 문학적 전통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전통 운율이나 전통의 시정신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형태의 해체와 파괴 행위에 전통적인 그 무엇이 스며들어 있을 것인가.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일종의 실험이라면 이 시집은 성공한 것이지만 길들여지지 않기 위한 싸움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물론 언어와 의식 양면 모두에서 전통을 거부하는 것은 신인답다. 하지만 싸움을 위한 그 나름의 방법론이 몰역사적이고 지극히 냉소적이라면 승리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많다고 본다.
난화염병을만든다(11쪽)
지겨운, 경찰차가불에탄다(13쪽)
참혹한상처를움켜쥐고짖어진깃발을펄럭이며(13쪽)
해방구를선포했다(15쪽)
조직은늘나를죄어왔다(15쪽)
불속에죽어간한얼굴이나를덮친다(25쪽)
뛰오올라간강의동3층엔타다남은신나통과자욱한연기(25쪽)
깨어진화염병은나의꿈이다(35쪽)
그는혁명은없다라고생각한다혁명은없다라고쓴다(43쪽)
혁명군이진주해온다는소식을(45쪽)
사람들이해방춤을추며환희를(45쪽)
혁명은그를잠들지못하게한다(71쪽)
광장에는찢어진전단만이남아있다(75쪽)
{붉은 기호등}에는 이렇게 광주항쟁, 혹은 학생운동의 현장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마치 르포르타주가 찢어 붙이기로 삽입되어 있듯이 전후좌우의 인과관계는 무시된 채 등장하여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다음과 같이 고문의 한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바른대로불어너희가죽였지?애들선동하려
고죽여놓고분신이다뭐다하는거아냐!썅
어이, 이새끼좀돌려
하재봉이 해설문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강한 사회적 환기력을 갖는 이러한 단어들은 이 시집 속에서 장식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정치적 억압과 학생의 데모, 권력의 폭력과 시민의 희생이 시의 문맥 속에 정상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혹은 절망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데 동원된 장식품이라는 얘기이다. 해설자는 그러나 이 시점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대한 것이기에 "사랑과 혁명이라는 사람의 가장 격렬한 양극에서 시인의 내면은, 사랑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옹호해주고 있다. 과연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반항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인의 정치에 대한 반감, 학생운동에 대한 거부의 의사가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옹호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반감이야 질곡의 현대사를 겪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또한 신세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꼽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혁명과 사랑 양자 중에서 택한 그 '사랑'이 전혀 숭고한 것이 아닐 때 문제는 자못 심각해진다. 시인은 분명 절망하고 있는데, 그 절망이 사회적·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섹스로 도피한다고 하여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3. 왜 이성과의 관계가 섹스로 매개되는가?
이 시집에는 '나' '너' '그녀' '너희들' 등이 나오는데 이들 화자가 제멋대로 등장하여 혼란스러움이 더욱 가중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장시가 이성간의 러브 스토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사랑에관한이야기다(13쪽)
그의이야기다그의사랑이고그의고백이다(17쪽)
이것은단지사랑에관한이야기이다(31쪽)
이것은사랑에대한이야기다이것은(57쪽)
이야기는가도가도끝도없는길위에서사랑에대한것이다(71쪽)
사랑이 이처럼 거듭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화자가 일정하지 않아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의 전모는 파악하기 어려다. 나-타인 사이의 대타관계인지, 나-너(그)-그녀의 삼각관계인지, 나-너-그-그녀가 얽힌 복잡한 관계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와 그녀는 성기로 존재하며, 나와 그녀의 관계는 섹스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맺어지고 갈등한다는 것이다.
린그녀의가랑이사이로피가(9쪽)
그녀의보지가쩍갈라진다(11쪽)
그녀는아무것도모르고잠들어있다그녀의입에자지를갖다댄다(13쪽)
이제그녀의몸은익을대로익었다그녀를터뜨린다(23쪽)
그녀는오르가즘에도달한다(43쪽)
그녀는나의자지를물고싶어한다(45쪽)
매일밤그녀의욕실로나의정액냄새가흘러들어간다(47쪽)
그녀가나의길게뻗은자지를움켜쥐고달리기시작했다(65쪽)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어떤 대화나 그리움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격렬한 육체적인 사랑이다. 그녀는 나의 성행위의 파트너일 뿐 인격적 교류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하재봉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타락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허물고 기름진 세계를 만들려는 시인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섹스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므로 이런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의식'(역사의식·사회의식)을 거부한 자리에서 행해지는 행위가 다름 아닌 노골적인 성행위라면 {붉은 기호등}의 가열한 실험정신은 그 가치가 부정될 수도 있다. 포르노 영화도 국내에서 제작·개봉되는 현실에서 이 정도의 파격은 그저 낯간지러울 정도라고 치부하면 그만일까. 이런 구절들이 이성과의 관계가 섹스로 매개되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장치라면, 표현이 저급함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시인의 비판정신을 유추해내기엔 "그녀의가랑이에서은하수가흘러나왔다"나 "쓰러진그녀의유방에서젖과꿀이흐른다"는 표현만으로는 아무래도 미약하다. 여체의 상품화로 문화 전반에 남과 여 사이의 불평등이 만연한 오늘날 시인의 이러한 짙은 육담은 '낯선 경험, 새로운 충격'을 오히려 약화시키고 있다. 이 정도의 장면이야 뒷골목의 포르노 필름에도 얼마든지 나오지 않는가. 시인이 섹스 행위 자체에 집착하는 대신 회임과 분만의 대지로서의 여성상을 그려냈더라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상 몇 가지 약점이 발견되지만 그것이 {붉은 기호등}이 내건 치열한 실험정신의 깃발을 꺾지는 못한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지금 화면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나도 본다. 기성의 권위를 거부하고,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오직 내가 직접 보는 것만을 믿을 테다'라는 시인의 신념은 일단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멀티미디어가 출판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먼 미래가 아니라고 한다. 읽는 시에서 보는 시로, 보는 시에서 보고 듣는 시의 시대로 우리는 갑작스럽게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1세기에도 우리의 시가 순수서정의 세계(이 세계는 영원히 존속하는 한편 그 의미가 조금씩 바뀌겠지만)에 계속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화려한 영상의 시대에 널리 보급될 멀티미디어란 괴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집 표지의 번뜩이는 눈은 김요일의 후속 작업에 대한 기대를 잔뜩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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