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소유하는 능력
문학의 양상과 가치에 대한 논의의 중심은 작품이 그 시대 문학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필연성을 가지며, 어느 정도의 ‘문학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다수의 시집들이 출판 러시를 이루는 현 실정에서도 ‘시집이 읽히지 않는다’라는 문제를 곱씹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러한 물음은 문학 전반에 반드시 필요한 질문으로 본다. 하지만 “시와 시인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시인의 현실과 시화된 세계가 일치하지 않으며, 시인의 의도가 독자의 경우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시인의 ‘삶의 진실’은 과연 詩 속에 진실하게 투영되어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김정희 시인의 인식은 시대의 어둠을 날카롭게 인식하되 격렬하게 터뜨리지 않고 깊은 사유의 통찰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의 인식이 구체적인 삶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경험에 대한 충실한 시적 조응력에 의한 감각적 수용이 결코 추상적인 관념에서 나오는 지적 유희나 감각적 유희 , 그리고 머리 속에서 관념적으로 존재한 괴리된 현실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은 김정희 시인의 ‘사회적 기질’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회적 성격으로서의 기질’을 일러 “시인의 체험과 삶의 탐구적 태도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고 변하는 것이지 수사를 익히듯이 배워서 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이규보의 말이 다시 생각나게 한다.
김정희의 시집 『산으로 간 물고기』(2004. 7. 문학의 전당)는 三生의 고통을 당하는 중생의 삶의 누적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의문 속에 첫 페이지를 열면, 시집 제목에서 주는 禪적인 화두와 함께 이 시대의 소외되고 버려진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으나 저마다의 가치를 가진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인 화두(꽃의 이미지가 변용된 여러 삶의 궤적)가 전작을 아우르고 있다. 역설과 거짓 욕망들이 판치고 짐짓 현란하나 천박한 수사와 감각이 떠다니는 ‘언어적 섬’에 갇힌 현대 시인들의 詩作과는 판이하게 다른 화두를 발견하게 된다. 김정희 시인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위로가 필요한 안쓰러운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교감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마치 살붙이들에 대한 애정을 깔고 결핍되고, 무너지고, 더러는 무시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의 특징이다.
1부에 나타난 13편 작품들은 이러한 시인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한다. 특히 노인들의 고단한 삶의 궤적을 그린 「목격」,「공공근로」,「소금꽃」,「저녁풍경」,「아픈꽃」은 ‘破紙’처럼 버려진 인생의 궤적을 안쓰럽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각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안쓰러움을 지나 부끄러움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안쓰러움과 부끄러움에 머물지 않고 疏外의 현실을 疏內의 문제로 들여온 시인의 인식은 깊은 성찰을 이뤄내고 있다.
여름 석양을 지고
리어카 끄는 노인의 등에 소금꽃 가득하다
빛 바랜 검은 티셔츠 위로 하얗게 솟은
엄숙한
노동의 꽃잎들
나는
차마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손에 들려있는
詩集이
무색하기만 하여
「소금꽃」 전문
태양만 한 솥 가득 끓고 있는 중복날 큰 길가엔
일흔은 족히 넘었을 늙은이의 비틀린 삶이 폐수
처럼 흐른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전봇대에 달
라 붙은 광고지들을 벗겨내는 거미 같은 손가락
들 그 주름진 손이 거대한 세상 한 귀퉁이를 긁
어대고 있다 점점 무뎌지는 손끝 금방이라도 허
물어질 듯한 다리 사이로 떨어져 점점이 무늬지
는 저건 땀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네이팜탄처럼
퍼붓는 땡볕에 저 남루한 살갗들은 곧 터져나가
리라 숨 멎도록 슬프게 늙은이의 눈물겨운 여름
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나 보다 숨이 콱 멎도록
「공공근로」전문
가족 공동체에서 유리된 노인들의 문제와 함께 곧장 시인은 이 시대의 소외된 자들의 궤적도 담아내고 있다. 농아들의 언어의 단절을 다룬 「푸른 말들의 행보」에서는 인간과의 소통의 문제를 손말(手話)과 마음의 문제로 들고 나와 쑥부쟁이와의 환한 소통을 보여준다.
골목에서 농아(聾兒)들 한 떼 몰려나온다
갑자기 허공이 붕붕거린다
혀끝에서 피지 못한 말들이 손끝을 타고 오르느라 분주하다
<중략>
어느 농아 쑥부쟁이에게 손말을 건넨다
꽃은 그 말 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 끄덕
<하략>
「푸른 말들의 행보」中
시각장애인의 점자 읽는 모습을 그린 「점자도서관에서」는 ‘눈을 뜬 사람’이 외려 천지간에 ‘닫힌 눈을 가진 자’ 라고 역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문득 ‘거울처럼 환한 눈’을 가진 시각 장애인의 길보다 나의 길이 오히려 울퉁불퉁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인식 행위가 시각적인 감각의 문제라기 보다 통찰의 문제로 접근했다는 뜻이다. 행려자의 ‘시든 꿈 조각 같은 잠’을 다룬 「잠의 저편」등도 행려자인 사내의 잠을 견고한 잠을 이룬 ‘흰 꽃 한 송이’처럼 묘사함으로써 자칫 ‘인정주의’에 그치고 말 감정을 견고하게 이끌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성치 못한 몸으로 남을 돕는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詩作 全篇에 나타나는 시인의 정체성 인식이 허위의식에 근거한 단순한 인정주의와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검은 안경을 쓴 젊은 사내
책을 읽고 있다
마치 흰건반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햇빛들이 수런대는 페이지 위에서
그의 손끝에 매달린 거울처럼 환한 눈들
점점 부푼다
<중략>
나는 본다
눈감지도 않고
닫히지도 않고
천지간에 자유로운
그의 눈들, 이 내뿜는
오백 룩스의 빛을
門을 닫고 돌아선다
문득 내 길이 울퉁불퉁하다
「점자도서관에서」中
행려자가 한미은행 층층대에서 자고 있다
바람이불 한 채 덮고 있다
초겨울 날씨보다 얇은 이불 속
사내의 몸은 한껏 둥글다
누군가가 사내의 잠에 사진기를 들이댄다 찰칵, 찰
칵, 렌즈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시든 꿈의 조각들
고요의 소용돌이 중심에 사내는 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그의 門앞에
흰 꽃 한 송이
견고하다
<하략>
「잠의 저편」中
오늘날 권력과 자본의 일정한 테크놀로지가 요구하는 방식과 기술에서 소외된 노인과 장애인들 그리고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그래서 흔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픔을 김정희 시인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을 전체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을 든다면 바로 「위로」일 것이다. 마치 쓰레기 더미에 반쯤 묻힌 누군가들의 생으로 보이는 구두처럼 이제는 그 효용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을 덮어주는 것은 바로 ‘꽃’이다. 그것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특별하고 화려한 꽃이 아닌 ‘개망초’다. 제 4부 ‘진술’에서도 ‘꽃’은 김정희 시인의 인식을 적절하게 발현시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목련꽃’,‘벚꽃’,‘배추꽃’,‘넝쿨장미’,‘메꽃’,‘물매화’,‘배꽃’ 등) ‘꽃’의 이미지가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되물음으로 귀착되도록 하였다.
공터를 지나다 보았다
쓰레기더미에 반쯤 묻힌
헌 가죽구두 속에
개망초 피어있는 것을
누군가의 생을 담고
거리를 누비다 버려진 구두의 슬픔을
꽃들이 덮어주고 있는 것을
「위로」-전문
2. 자연과 인간의 교감 - 疎外에서 疎內로
제 2부에 나타난 화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태학적 화두다. 17세기, 데카르트적인 합리적 세계를 추구하던 서구적인 물질 우선의 권력조건들이 진보와 문명으로의 발전개념으로 인식된 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생태적 삶을 손상시켰고 그것은 곧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불러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정희는 생태학적 이해의 확장이 곧 생명의식의 확장이라는 근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생물학적 결핍’이 곧 ‘인간 실존의 결핍’이라는 것을 상응시켜 보여준다. 그 옛날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했던 시기, 미국 보스턴의 한 공장에서 공장증축을 위해 고용주가 공장 부지에 심겨져 있던 느릅나무를 자르려 하자 그 나무를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임금 인상을 위한 파업이나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한 파업이 아니라 느릅나무를 지키기 위한 파업이었던 것이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그 느릅나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투사시킨 것이었다.
제 2부 ‘산으로 간 물고기’ 에서는 ‘목어’,‘지렁이’, ‘거미’,‘버마재비’,‘도둑고양이’,‘매미’,‘민달팽이’,‘목련’,‘섶다리’ 등 어쩌면 너무 미미하여 관심이 될 수 없거나, 잊혀진 것들이 시인의 연상을 통해 발화되는 내용은 삶의 관통하는 화두로 재인식된다. 단순한 외물 인식이 인간 실존의 문제로 확산되면서도 인간중심주의의 편협한 구조로 함몰되지 않았다.
그의 집은
지상에 없습니다
투명한 방과 들마루와 부엌이
그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잠을 잡니다
그의 잠은
너무도 깊어서
누구도 깨울 수가 없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이
등불처럼
그의 잠을 비추어도
그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그를 덮친
바윗덩이 만한 돌멩이 밑에서
「민달팽이의 잠」전문
소낙비 그친 뒤
수 시간 걸려 아스팔트로 올라왔을 지렁이가
후진하던 자동차에 깔린다 수 초 전까지 살아
꿈틀거리던 그가 금세 한 장의 전개도처럼 펼쳐진다
그 때, 누가 들었을까? 그 지렁이의 마지막 울음소리를
409호 베란다에 사는 비둘기들이 새파랗게 눈독들이는 소리를
비둘기들이 재빨리 내려가 축축한 전개도를 떼어 물고 간다
아스팔트에 복사된 지렁이의 생이 붉은 우표처럼 붙어있다
바로 그 자리에 짐차 한 대 들어선다
「지렁이의 울음을 누가 들었을까」 전문
「민달팽이의 잠」에서는 비록 ‘바윗덩이 만한 돌멩이 밑에 깔려 죽은 달팽이의 죽음’(삶이 어떤 외부적인 물리력에 의해 파산됨)을 ‘깨울 수 없는 잠’으로 「지렁이의 울음을 누가 들었을까」에서는 ‘수 시간 걸려 아스팔트로 올라왔을 지렁이가 차바퀴에 깔려 죽는 것을 비둘기가 떼어 물고 간 흔적’ 등은 미미한 것들의 삶의 흔적을 인간 삶의 고통과 관련한 것들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고통들이 禪적인 화두로 수용된 작품들도 보인다. 「어떤 사랑」에서 ‘버마제비 한 쌍’이 보여주는 희생제, 「우화, 그 뒤」에서는 매미의 우화자국을 통해 본 通道의 길, 「동강의 섶다리」를 통해 보여주는 인연의 회한, 「겨울 호수」하나에도 ‘겨우내/우글거리는 고요를 타고 앉아 //이듬해의 生을 천천히 들어올리고 있다’는 인식 등은 사물에 대한 외경에 가까운 시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외경심과 감탄은 가장 은밀한 꿈을 부풀리고 있는 씨(생명을 영위하는 터전)처럼 작품「씨 안엔 꽃들이 산다」속에 결집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불 켜지 않아도 밝은/물 없이도 목마르지 않은/제 몸에 꼭 맞는/ 방에서/꽃들 자라고 있다’고 함으로서, 미미한 것들에 대한 외경심을 품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메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가장 큰 적멸의
방에
꽃들이 누워 있다
불 켜지 않아도 밝은
물 없이도 목마르지 않은
제 몸에 꼭 맞는
방에서
꽃들 자라고 있다
몸을 부풀리고 있다
가장 은밀한 꿈
꾸고 있다
눈 뜨고
있다
「씨 안엔 꽃들이 산다」전문
3. 못에 걸린 아버지와 우물 속의 房
김정희 시인의 심층 심리 기저에는 생명력을 가진 말의 함축과 통찰이 지성과 상상력의 중요성과 함께 기술적 세상에 인간성 우위를 시적 존엄성으로 변환시켜 씨날줄로 엮어 삶의 현장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것들이 실재화 되고 공감을 이루는 바탕으로 내재화시킨 탁월한 생명에 대한 정열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유년의 아픈 기억들이 바탕이 됐다. 제 3부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 ‘싯뻘겋게 철쭉꽃처럼 피어오른 아버지’의 기억, 과 ‘한나절 내내 쇳대 안에 갇힌 나’의 기억들이 ‘억압’으로 나타나 삶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으로 시집 전체에 푸지게 발산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증언행위가 역동적인 실존을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슬픔의 힘’이 극대화되어 마침내 ‘조화로운 삶에 대한 동경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 됐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시인들이 사적 결핍에 함몰되어 비극적인 심미적 세계로만 후퇴하여 단절과 죽음, 그리고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것과 분명하게 대비되는 좋은 예다.
아이들의 자전거가 햇빛을 부수며 달려온다
키 작은 나무숲을 뚫고
등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그늘로 들어선다 차르르르
멈추려는 바퀴들에 내 시선이 꽂힌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아버지가 자전거 바큇살에 끼어 있다
안간힘을 쓰며 빠져 나오는 아버지
<중략>
낮달이 마른 후박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얼마 후
대로변 사진관 앞에서 아버지의 자전거가 버스에 받혔다
아주 잠시, 공중에 머물다 떨어지던 아 버 지
순간 아버지 몸에서 싯뻘겋게 철쭉꽃 피어올랐다
꽃잎들에 갇혀 아버지 울컥울컥 숨이 멎었다
동짓달 찬바람 속
아버질 깊숙이 심었다
<하략>
「그 뒷문 너머엔」中
아버지가 후줄근하게 못에 걸려있네
목은 없이 팔 다리만 축 늘어진, 그
못에 걸린 아버지가 잠꼬대를 하네
거대한 바람벽이 턱 턱 그를 가로막네
너무도 완강하게 박힌 못과
너무도 헐렁헐렁한 아버지
허수아비 하나
잠언처럼 걸려있는 저 대못 위로
밤이 훌쩍 지나가고 있네
「못에 걸린 아버지」 전문
김정희 시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간단찮은 기억들이 누적되어 있는 작품들은 시리고 아프다. 사별한 아버지의 기억도 흑백 사진처럼 그녀의 기억에 꽂혀있다. 그것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아버지가 자전거 바큇살에 끼어 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너무 선명한 ‘父의 不在’ 이미지가 시인의 기억 속에서 찰라적 영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못에 걸려 목은 없이 팔다리만 축 늘어진 모습’의 아버지다. 또한 어머니의 병수발로 20대를 보낸 김정희 시인에게는 ‘녹슨 철사 줄 같은 기억만 꽂아놓은 어머니’가 있었다. 작품「녹슨 쇳대가 나를 끌고」에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섬뜩하여 시인의 ‘정신적인 허기’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게 한다.
<상략>
나는 그 쇳대를 들고 어떤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
아주 커다란 자물쇠를 열었다
안은 고요했다 침을 꿀꺽 삼킬 때마다
거미줄 같은 고요가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어미의 뽀얀 이마가 연탄가스 속에서 부풀어올랐다
손등에다 칼금을 긋는 어미
노란 비닐장판 위로 붉은 도장꽃 수도 없이 피어났다
<하략>
「녹슨 쇳대가 나를 끌고」中
하지만 그녀는 삶의 질곡을 헤쳐나가는 빛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 힘으로 땅을 밟지 못할 정도로 앓으며 몇 해를 보낸 끝에 ‘상처투성이의 들끓는 삶 속 꽂힌 그것들’이 어느 때부턴가 그녀의 입을 빌어 나오기 시작하자, 詩는 동반자 차원을 넘어 생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시를 통하여 스스로 상처를 싸맬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시들이 다시 이 세상의 모든 버려지고 무시되고 보이지 않는 소외된 것들에 대한 애착을 통한 시적 발현을 폭넓게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김정희 시인에게 있어 詩는 개인의 정체성에 밝혀주고 확장시켜주는 ‘열림’ 이지만 대 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자기 성찰의 키워드’로 작용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詩의 眞實과 人間의 眞實
제 4부 ‘진술’에서도 제 1, 2부와 같은 인식의 연장을 이루고 있다. ‘꽃’이나 ‘나무’, ‘눈’,‘폭설’, ‘흰나비’와 같은 상징을 통해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그러나 삶의 논리로 열려진 시인의 인식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희 시인 자신의 의식 궤적을 다룬 작품 「쳐들어오는 봄」,「4월 5일」,「반란처럼, 목련은 피고」,「성에꽃밭에서」,「불면」등과 현실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과 분석류 특히 역사적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인간의 심층을 드러낸 작품「음력 삼월 하순경」은 목련꽃이 떨어진 것에 ‘전봉준’, ‘최시형’, ‘이차돈’, 그리고 역사발전을 위해 산화한 이름 없는 자들의 파편을 담고있다. 그 원동력은 바로 봄(혁명)이 일으킨 목숨이라고 보았다.
간밤에
목련꽃 모가지들이 斬首를 당했다
나뭇가지들만 멀뚱하니 서서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모가지들 하나 하나 날아갈 때마다
흰 피가 솟구쳐 올랐을 거다
캄캄한 허공에서 소용돌이쳤을 거다
어둠이 흰 피로 얼룩진 채 돌아갔을 거다
누가 와서 그들의 목을 베었을까
바람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 그랬을까
아니면 가지 속에 숨어있던 자객의 짓이었을까
봄이 일으켜놓은 목숨들을 뎅강 뎅강 쳐낸 그는
누구일까
청소하는 손길이 와서 모가지들을 거두어 간다
전봉준의 모가.......................지가..........................최
시형의......................이차돈의 모가지...............무명
으로 죽어간 A, B, C............................모가지들이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 뒤엉켜 있다
「음력 삼월 하순경」전문
때로는 ‘꽃’의 이미지를 통해 禪적인 화두를 보이는 작품「經典을 읽다」와 「허공의 층계를 밟다」,「無字書」도 다시 등장한다. 특히「진술」과「폭설」에서는 마치 巫女가 신내림을 받은 듯한 언표를 내 비치기도 한다. 그것은 시집 첫 장에 쓴 「自序」 ‘나는/어느 별에서/유배를 온 것일까//바람이 멎지 않아/잠재울 수 없는/나는’에서 보듯 ‘바람이 멎지 않아 잠들 수 없는 영혼’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벚나무에서
나뭇잎 한 장 떨어지고 있네
불에 데인 마음 한 줌 떨어지고 있네
해탈하는 순간이 저러할라나
나는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저 나무를 베어다
까마득한 허공에 걸어두리라
불길 속에 훨훨 나는 나뭇잎 한 장
거기 붙여두리라
「經典을 읽다」전문
불화살을 맞은 나무들이 늘어갔다
906-8번지 언덕배기에 서서 나는
불의 혓바닥들이 널름널름
산지사방을 먹어치우는 소리 들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이파리들
매일같이 가슴속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수태 담금질 당했다
그 자리엔
나뭇잎 모양의 불 자국만 남았다
황홀한 저승이다
「진술」전문
오늘날 ‘시의 진실’은 ‘삶의 진실’과 괴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 뒤에는 문학이 기저층보다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것이며, 그들의 상업적 이해에 발빠르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미적 지각의 대상은 작품일 뿐이며, 예술가의 삶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질감의 발생에 대하여 “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조작할 경우 이질감이 발생한다.” 라고 한 말을 지적하고자 한다. 비평가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작품이 난해하거나 사적인 결핍과 관념들의 익숙하지 않은 상징들의 난립을 부추기는 광기 등을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의 ‘삶의 진실’이 詩 속에 투영되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의 삶의 전망 속에서 복잡 다단하게 대응되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과의 ‘내면적 일치’를 이루는 일일 것이다. 산업 사회의 외면적 재난이 키운 현실적인 불안과 공포, 기술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고의 확산이 가져온 폭력적인 시스템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는 자기 시대의 현실을 통해 물어보아야 할 시인의 책무라고 본다. 체르느이셉스키는 『현실에 있어서 예술의 미학적 관계』(1853)에서 “예술의 원천은 객관적인 현실이요, 현실은 또한 우리들 내부에서 미적 감각을 환기시킨다”라고 말한다. 또한 “예술의 대상은 생활과 여러 상황 속의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문학 작품이란 인간이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생생한 예로써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김정희 시인의 시집『산으로 간 물고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현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때로는 고요와 적멸의 禪적인 공간으로 이끌고 오기도 하고, 때로는 꽃과 나무, 벌레의 미미한 세계에 대한 연민으로 끌고 오기도 한다. 그 연민의 밑바닥에는 바로 현실에서 소외된 인간들의 군상을 통해 생생한 인간 가치의 옹호 메시지를 강렬하게 밝혔다. 환언하면 ‘시의 진실’과 ‘인간의 진실’에 대한 폭넓은 성찰의 화두를 던진 시집이라고 볼 수 있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04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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