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행운
-현진건 / [운수 좋은 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 쉽게 또 너무 흔하게 쓰기 때문에 그 말이 품고 있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빛을 잃은 채 죽어 있는 말들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쓴 맛이 다하면 단 맛이 오고,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라는 말이 있다. 쓴맛과 단맛, 기쁨과 슬픔, 행 불행 따위로 자연의 이원론적 이치와 그 운행을 살피는 일은 동양이나 서양이 별로 차이가 없는 듯싶다.
아직도 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에머슨의 사상 가운데 한 면을 보이는 보상론(compensation) 단상의 한 귀절을 보면 이렇다.
"한 낱의 지혜가 있으면 반드시 한 낱의 어리석음이 있다. 만일 부가 늘어난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이도 늘어난다. 또 만일 거두어들이는 이가 지나치게 많이 거두어들이면 자연은 그 사람으로부터 그 곳간에 거둘어들인 만큼을 빼앗는다. 그 재산이 불어나지만 그 소유주를 죽인다. 자연은 독점과 예외를 미워한다."
이 자연원리는 엔트로피 법칙과도 상응하는 것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당장 처한 일 속에서 스스로를 달래는 데 얻는 바가 많다. 물론 밤낮없이 돈 벌어들이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는 이들에겐 좀 골치아픈 사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자연법칙은 어김이 없는 것으로 내겐 보인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이라는 단편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꽤 자주 얘기가 되고 또 그래서 계속 읽히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바로 위에서 얘기한 삶의 보상이론에 근거를 두고 씌여진 소설이다. 하필 인력거꾼이라는 가난뱅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어서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쥐어짜지만 그게 바로 작가의 의도적인 뜻이었다고 볼 때 우리게 있어 어느 날 혹은 어느 해에 보여준 행운의 여신의 미소란 과연 무엇인지 이 작품은 다시 생각해 보기를 당부한다.
작중인물 김첨지는 인력거꾼이다. 젖먹이 아들 개똥이를 거느린, 벌써 달포째 기침으로 콜록거리는, 병든 아내아 단 세 식구가 조밥이나마 굶기를 밥 먹다시피 하면서 힘겨운 삶의 바퀴를 굴려가던 한 인물 김첨지는 비가 오는 어느 우중충한 날 운수가 대통을 한 것이다. '첫번에 30전, 둘째번에 50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10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각 하고 손바다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80전이란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음이다.'
주인공은 아침에 한바탕 아내를 패주고 나온 김이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먹고 싶다고 졸라댄 아내다. '앓는 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흡뜬 눈이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이런 오라질년! 조팝도 못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쳐먹고 지랄병을 하게"라고 야단을 쳐 보았지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아침나절부터 재수 좋게 손님이 이어 있어 돈이 주머니에 찰수록 빨리 아내를 보고 싶고 설렁탕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김첨지에게 웬일인지 자꾸만 손님이 생겨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켕기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돈 버는 재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해서 해거름 때야 집을 향해 돌아섰으나 그는 도무지 예고된 불행의 예감 때문에 그냥 집을 들어서지 못한다. 그는 그날 하루의 행운이 온전한 것이기를, 그것이 정말로 행운이기를,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날 하루의 벌이가 거금 30원이나 된 것이다. 누군가 이 인물의 불행이 예감된 행운을 함께 나눌 사람을 찾던 중 주인공이 치삼이를 만나 술과 안주를 먹어대는 장면은 정말로 묘하다.
"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먹음먹이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 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위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주린 창자는 음식 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한다. 순식간에 두부와 미꾸리 든 국 한 그릇을 그냥 물같이 들이켜고 말았다. 세째 그릇을 받아들었을 제 덮히든 막걸리 곱배기 두 잔이 더웠다. 치삼이와 같이 마시자 워낙 비었던 속이라 찌르를 하고 창자에 퍼지며 얼굴이 화끈하였다. 눌러 곱박이 한 잔을 또 마셨다. 김첨지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석쇠에 얽힌 떡 두 개를 숭덩숭덩 썰어서 볼을 불룩거리며 또 곱박이 두 잔을 부으라 하였다."
끝 장면은 누누이 밝혀 둘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발길로 발을 차고 손바닥으로 뺨을 치면서 설렁탕 먹으라고 아내를 깨워도 이미 아내는 뻣뻣한 물건으로 변했으니까. 뺨을 쳐도 손자국조차 나지 않는 주검을 놓고 앙드레 말로는 우리들 삶의 허망함을 탄식했던 적이 있다. 말로의 주인공처럼 사변적이거나 명상적인 장면은 아니지만 김첨지가 맞이한 불행 외피로 드러난 우연한 운수의 허망함을 이 소설이 감동적으로 보이는 데는 그야말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 죽은 엄마이 빈 젖을 물고 하루종일 늘어져 있던 개똥이라는 아이의 추레한 몰골도 끊임없이 눈에 밟힌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보상이론과는 거리가 먼 작품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겪은 그날 하루의 행운이란 실상 그들 계층의 불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작가적 트릭일 수도 있고 또 그런 식의 운명의 장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행운이라 불행이 내포하고 있는 반대면을 생각케 하는 데도 꽤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신의 행운을 쓸모있게 쓸 것이고 행여 그에게 닥친 것이 불행이라 할지라도 그 때문에 지나치게 서러워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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