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절 선암사를 지난 길은 20리를 흘러 송광사까지 이어진다.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풀어 놓은 짙은 숲 그늘. 숲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비린내가 가득하다. 세찬 계곡물은 바위와 이끼를 핥으며 쏟아진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 길을 쉬 지나지 못한다. 선암사는 꽃을 길어내는 절이다. 철쭉은 녹음 속에 불을 밝혔고, 대웅보전 뒤꼍에는 불심처럼 빨갛게 영산홍이 물들었다. 수국은 선방 담장에 기대어 연둣빛 꽃망울을 수북하게 터뜨려 꽃의 절, 선암사를 빛나게 한다.
 선암사 꽃길을 지나
햇차를 덖는 구수한 냄새를 뒤로하고 굴목이재로 향한다. 굴목이재는 우리나라 사찰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고개. 바지런한 걸음으로 세 시간이면 넉넉히 넘어갈 수 있다.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풀어놓은 짙은 숲 그늘이 고갯길 첫머리부터 트레킹을 매조지하는 송광사까지 이어진다.
선암사를 벗어나는 길에 봄빛이 길바닥을 수놓았다. 아름드리 왕벚꽃나무에서 떨어진 벚꽃이 길에 수북하다. 연분홍빛으로 물든 꽃길을 지르밟고 지나는 걸음이 새삼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두어 걸음이면 굴목이재를 향한 진짜 산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전에 발길을 멈추고 만다. 활엽수의 바다라는 조계산에 보석처럼 박힌 편백나무 군락이 ‘게 섯거라’ 외치기 때문이다.
선암사의 편백나무는 수령 60~70년 된 것들이다. 한아름씩 되는 녀석들이 곧장 수직으로 솟구친 모습이 장관이다. 그 깊은 편백나무 숲에 노란 꽃을 틔운 피나물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어둑어둑한 숲이 꽃 덕분에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환하다. 어찌 발길을 쉽게 옮길 수 있을까. 그런 연유로 등산객들은 편백나무 숲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한참씩 쉬었다 가게 마련이다.
편백나무 군락을 지나면 등산로는 제법 산길다워진다. 숱한 등산객의 발길을 받아내 헐벗은 산길은 툭툭 불거진 바위와 꿈틀꿈틀 뻗어나간 나무 뿌리가 덮고 있다. 그 산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옛사람을 떠올려본다. 이 길을 따라 선암사와 송광사의 스님들이 오가며 우정을 나눴을 것이고, 승주의 처녀는 꽃가마를 타고 낙안읍성으로 시집을 갔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도 이곳 조계산이다.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던 해방 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이 산을 무대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그 숱한 사연과 사연이 계단을 이루고 산자락을 훌쩍 넘는 고갯마루가 되었다.
 조계산의 활엽수는 예로부터 이름이 났다. 근동의 사람들이 구들장을 데울 때 쓴 숯은 죄다 조계산에서 난 것이다. 50여 년 전만 해도 골짜기마다 한두 곳쯤 숯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굴목이재로 오르는 길가에 자리한, 이끼에 덮인 숯가마 터만이 한 시대의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숯가마 터를 지나면서 계류 흐르는 소리가 저만치 멀어진다. 고갯마루가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이곳부터 가파른 돌계단이 시작된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심코 발길을 내딛은 사람들은 ‘아차’ 싶은 곳이다. 그러나 힘들어만 할 일도 아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숨이 차면 잠시 고단한 발길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면 눈높이에 맞춰 펼쳐진 초록 바다가 타는 속을 씻어준다.
다리에 힘 돋우는 구수한 밥 냄새
굴목이재에 오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이제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가파른 오르막은 없다. 사실 굴목이재는 두 개다. 선암사에서 오르는 길의 고갯마루는 선암굴목이재라 부르고,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고갯마루는 송광굴목이재라 부른다.
하지만 송광굴목이재로 오르는 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적당한 오르막이라 걱정을 놓아도 된다. 힘이 남아도는 건각이라면 이곳에서 배바위를 거쳐 조계산 정상을 밟아보는 것도 좋다.
선암굴목이재에서 마음이 급해진다. 선암굴목이재와 송광굴목이재 사이에 자리한 맴사골 보리밥집의 구수한 밥 냄새 때문이다. 선암굴목이재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계곡에 걸친 나무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를 건너면 사람들이 주막집이라 부르는 보리밥집이 있다. 20년 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 집의 보리밥은 미식가들에게도 이미 이름이 났다. 굴목이재를 넘겠다고 나선 사람들 가운데는 이 집의 보리밥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계곡 주변의 키 낮은 주막집. 몇 아름이 넘는 느티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 앉아 골바람 쐬어 가며 동동주 한잔 걸치는 기분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보리밥은 또 얼마나 단지 모른다. 짙은 녹음 속을 걸으며 땀을 흠뻑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라도의 푸짐한 인심이 담긴 보리밥은 꿀맛이다.
상추와 돌나물, 참나물, 버섯 등의 산채는 이 집에서 직접 기르거나 조계산에서 딴 것들이다. 이 산나물을 듬뿍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 한 방울을 살짝 쳐서 비비면 밥 한 사발이 게눈 감추듯 비워진다. 장작불로 알불을 만들어 가마솥에서 펄펄 끓여내는 구수한 숭늉은 또 어떻고. 그렇게 실컷 먹고 나면 산행은 그만 접고 평상에 누워 한숨 낮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아진다.
다시 게으른 발걸음을 송광굴목이재로 옮긴다. 포만감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완만한 기울기의 고갯길 덕택에 발길이 굼뜨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철쭉 숲을 지나면 송광굴목이재다. 이제부터 송광사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여전히 활엽수가 만든 숲 그늘 속으로 산길은 이어진다. 그러나 같은 활엽수림이라도 선암사 쪽과는 다르다. 샛노란 꽃망울을 틔우고 지천으로 널려 있던 피나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빼곡하게 자란 해장죽이 차지했다.
조금은 지루한 하산길이다. 그렇게 40분쯤 내려가자 시원한 계곡 물 소리가 마중을 나온다. 계곡에 걸린 다리 세 개를 지나자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로 불리는 송광사다. 고려 말 보조국사 지눌이 타락한 불교를 쇄신하자고 정혜결사를 부르짖었던 절이다. 그후 송광사는 큰스님의 맥을 잇는 승보 사찰이 됐다. 이 절에 내재된 깊은 정신은 200여 명의 학승들이 조계산의 아침을 여는 장엄한 새벽 예불에 담겨 있다.
송광사로 들어가는 다리이자 정자인 우화각에 걸터앉아 다리를 쉰다. 그림처럼 잔잔한 물 위로 하늘이 가득 들어앉았다. 싱그러운 5월의 숲에서 반나절을 보낸 행복이 물 위로 물감처럼 번진다.
▒ Strategy
조계산은 해발 884m의 그다지 낮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바위투성이로 악명이 높은 호남의 산과 달리 아늑한 품을 가진 육산이다.
오르기에 큰 무리가 없다. 조계산 등산은 선암사~큰굴목이재~송광사 코스가 일반적이다. 길이는 8.7km.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굴목이재는 산의 4~5분 능선을 따라 난 길을 걷는다. 선암사나 송광사, 어느 쪽을 들머리로 잡아도 상관은 없지만 선암사에서 출발하는
게 조금 쉽다. 또한 산길을 오르며 볼 것도 많다. 샛길이 많지만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물과 밥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정상 등정이 목적이라면 선암사~장군봉~큰굴목이재~선암사 코스가 빠르다. 6.8km로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 Information
<가는 길>
경부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승주 IC로 나오면 선암사까지는 15분 거리다. 경부와 대전~진주, 남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산행을 마치고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돌아갈 때는 버스편을 이용해야 한다. 송광사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순천행 버스를 타고 와 승주읍에 내린다. 승주읍에서 선암사까지 버스편이 자주 있다.
<숙박>
선암사와 송광사 입구에 민박과 여관이 많다. 선암사 입구에 있는 목인(061-754-5435)은 식사를 겸할 수 있는 민박집으로
개울에 접해 있다. 송광사 쪽에는 조계산장(061-755-2150), 송광여관(061-705-2125) 등이 있다. 2만~3만원.
<맛집>
송광사나 선암사 입구에는 산채정식을 잘 하는 집이 여럿이다. 어느 집을 가더라도 후덕한 전라도의 인심을 맛볼 수 있다. 산채정식은
선암사 쪽은 새조계산장(061-751-9200), 송광사 쪽은 길상식당(061-755-2103)이 잘한다. 1인분 8000원. 발췌 : 애니카라이프 > 혼자 떠나는 여행 | |
여행지안내 (운영자 : 약초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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