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싸움
김 요 일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김요일 시집 <,애초의 당신> 중에서
이 시의 시간은 달빛이 길을 가르쳐주는 때이므로 적어도 반달에서 만월
이후이며 공간은 화전(花田),즉 꽃밭이다. 달빛과 꽃밭, 고즈넉하고 그윽하다.
둘 다 음기가 강하다. 그러므로 이 시의 마당에는 탯줄 자르는 숭고한 소음과
비릿한 양수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통통한 꽃잎을 하나씩 뜯어내며 마지막 꽃차례만 남을 때까지 꽃싸움을 하던
시절, 배고픈 우리에게 어떤 꽃들은 음식이기도 했지만, 괜찮은 놀잇감이기도
했다. 눈을 맞추기가 수줍은 어린 연인들이 꽃그늘 아래서 능청스러운 꽃싸움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한 꽃은 이미 최고의 발현이기 때
문에 어떤 사랑도 꽃그늘 아래서 무색하다. 그 그늘 아래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는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원형의 자궁이랄 수 있겠다. 세상에서
이 근원의 냄새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땅이 바다에 둘러싸
여 있듯이 우리는 무한한 여성성, 모성에 둘러 싸여 있다. 그것은 우리를 태
(胎)처럼 둘러싸고 있으므로 멀리 나아가지 않으면, 안주하고 있는 항구를
떠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모성, 혹은 신성은 달빛처럼 은은
하게 우리의 시력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새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시인
은 드디어 그리운 당신과 하나이다. 이미 하나이면서도 더욱 깊은 합일의
표시로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새긴다. 이 시에서 무한한 여성성에 대한 그리
움은 이렇게 문신으로 구현된다. 그러나, 모성과 달리 당신과의 사랑은 유한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시인은 환장할 노래나 부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성을 복사해내는 희귀한 사랑을 마침내 찾은 시인은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꽃밭이든, 숲을 불태운 삭정이밭이든 두렵지 않은 것이다.
아침가리 계곡이든 곰배령 높은 고개든 무섭지 않은 것이다. 당신을 업고
안고 밤을 건너 갈 것이다. 일생에 한 번 천행으로 나는 대지의 어머니, 그녀
를 만난 것이다.
시인은 잃을 것 뺏을 것이 없는 평화로운 빈들과 꽃집과 밤을 건너 안고 갈
수 있는 따뜻한 육체를 안다. 그리고 순간들을 안다. 현존(現存)을 안다. 생의
짧은 순간의 촌철(寸鐵) 같은 쾌락을 안다. 헬라어에서 ‘안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oida 로서 내적이고 주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아
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저절로 아는 것과 같다. 하나는 ginosko 로서 외적이고
객관적인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김요일 시인은 삶과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앎을
이 시에서 구사하고 있다. 이 ‘앎’으로 인해 순간이 주는 희열을 바닥까지 마실
줄 아는 그는 결코 머물지 않는다. 주위와 흡사하게 되는 것, 과거와 흡사한 것
을 거부한다. 그의 사랑은 하루만, 하루만...이다. 실은 그의 하루는 영원과 간절
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혹시 혁명과 체 게바라와 아바나와 술과 모든 향기로운 노래를 좋아하는 그의
부드러운 바이브레이션을 들어보았는지?
시인의 노래를 눈을 감고 들으면 여인들은 자신들의 나신에 향유가 부어지고
그 미끄러운 향유가 부드럽고 아득하게 살갗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속살속살, 그의 나드 향유 같은 노래 소리가 영원하길 빈다. 하루만, 하루만 더
견디면서, 꽃대궁에서 꿀을 흡착하는 나비처럼 생의 정수를 남김없이 즐기면서...
혁명가는 이렇게 외친다. Patria o muerto!(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그러면 시인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을 !
단평 나 금 숙
200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레일라 바래다주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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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