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률 그림/목련꽃 도서관
천국의 화폐 또는 목련꽃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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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화폐
나 금 숙
가장자리가 다 닳은 지갑을 열어
천국의 화폐를 눈부시게 내미는
꽃나무는 교환의 수단을 안다.
창공에 내미는 이 화폐가
무엇을 살 수 있는지도
묵은 지갑에 저축한 생명의 원천이
저렇게 희디 흰 유혹임도 안다.
나도 축적된 내 사랑을 천국의 화폐쯤 되는 줄 알고
환원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등가(等價)가 아니어서
내가 집기도 전에 그들은 등을 돌렸다.
이 봄에도 묵은 꽃나무는
부스럭거리며 귀퉁이 닳은 지갑을 꺼낸다.
예부터 저 목련은 신용 그레이드가 아주 높았지
내 낡은 지갑에 새 피를 직방 수혈한다.
내게서도 갓 찍어낸 화폐의 향기가 날 것 같다.
바라던 어떤 것도 살 수 있겠다.
가령, 홍수라도 엄몰 못하는 불길 같은 사랑,
신의 마당에서의 단 한번 사람의 사랑,
그 환상과 꼭 한번 결혼해 보는 것,
글쎄 이 봄에는 환한 절정에 한번 오를 것도 같은데...
지금 실존의 인물이 그린 실재의 꽃을 마주보고 있다. 한 송이의 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가 질 때까지 꽃의 말을 형형색색과 함께 향기로써 전해들을 수 있는 영민한 눈을 가진 이 순간은 얼마나 다행인가? 꽃 앞에 마주 선, 나는 또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꽃에게 나의 발이 다가서고 손이 절로 내밀어지는 까닭은 꽃의 존재가 이름에 걸맞은 향기로운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그림 속에 내가 있다. 꽃이 피었다. 봄날이다. 꽃이 시든다. 그림 속의 소녀였던 내가 나이를 먹어간다. 더 환한 한 그루의 나무가 목련이란 이름으로 발치에서 흔들린다. 손으로 꽃들을 만진다면, 저 고운 의미들이 화르르 질 것 같다. 나 역시도 그 무리이고 싶다. 마침내 내가 무너지고 내 삶의 어느 파편이 저토록 의미로 흩어진다면 내 진 자리에도 꽃이 필까? 층층이 쌓인 향기를 밟고서 누군가 더 높은 환희에 접근할 수 있다면 내 몸이 바로 그 천국의 화폐가 될 것이다. 자신이 소멸된 자리에 다시 환한 목련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꽃이 지는 것을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몸에서 푸른 잎이 지는 때를 서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음을 기울이고 다시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의 바탕은 종이이고 종이의 전생은 나무이다. 그 나무는 또한 우리 육신의 부패하고 발효된 요소들인 흙에서 자랐다. 바람 한 점 없는 그림 속에는 나무가 키운, 나무를 키운 한 여자가 앉아 있고 여자가 펼쳐든 것은 아직도 새가 되지 못한 지상의 말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책은, the Book은 모든 것을 포함한 세계이며 우주이다. 그런데 더 높은 위치에서 여자와 책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 뿌리가 보이지 않는 가장 적당한 크기의 나무이고 목련이다. 이런 조화와 상생, 인연이 한 폭에 고여 있다. 뿌리의 숱한 곡절과 아주 먼 바람의 소리, 허공의 미세한 흔들림마저 듣는 것은 나무이고 그 어떤 소리라도 흡수해 기필코 아름다운 의미로 전달해주는 것은 나무가 가진 입, 꽃의 향기일 것이다. 지상의 어떤 존재가 저 꽃, 저 목련처럼 숭고한 영혼을 가졌을까? 꽃처럼 귀한 입을 가졌을까? 결코 현란하지 않은 한 폭의 그림에서 화폭의 이면을 짐작해보면, 완벽한 형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꽃은 이미 가장 상위개념의 지성이고 현신한 모신(母神)이다. 지상에서의 어떤 존재가 저 자신의 여정을 저처럼 아름답게 책임질까? 그림 속을 더듬는 순간 화가의 현존경험이 만져지기도 한다. 내년이 오면 내 것도 같고 당신 것도 같은 목련은 그림 속에서도 좀 더 키가 자랄 것이다. 뿌리는 좀 더 멀리 발을 뻗을 것이다. 나는 더 오래 그림을 볼 것이다. 내 머리 위에서 결코 추락하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이미지의 환유를 즐길 것이다.
프랑스 사상가이며 독창적인 저서 ‘시뮬라시옹’의 저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면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다. 무언가를 감추는 것으로부터 아무 것도 없음을 감추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다. 그가 말한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미사일 발사라는 현대전에서처럼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가 실제보다 더 실제인 독자적인 현실인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된다. 또한 도출하거나 제거하는 추상작업에서 도출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말하며, 제거하는 작업은 본질적인 것을 남겨 놓고 군더더기를 제거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 본질적이란 것이란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항상 정신적인 것을 지칭한다. 그에 따라 이원적 대립이 가능하다. 천상과 지상의 대립,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대립, 상상과 현실의 대립, 상상과 구체의 대립이 이에 속한다. 이 대립의 축 중 후자는 원칙적으로 본질적인 전자로부터 유래한 변형물이거나 반영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추상화작업은 역으로 현실로부터 이미지라는 추상물을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이 추상화된 이미지는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추상적 본질의 이미지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미지의 기묘한 위상이 있다. 이미지와 그가 나타내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는 본질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이미지는 여기서의 본질을 찾는 예술가의 정신적인 활동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어쨌든 내가 목련꽃을 보고 쓴 ‘천국의 화폐’란 시나 박항률의 ‘목련도서관‘이란 그림이나 다 본질을 복원해내는 이미지의 재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실재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시스템은 그의 권력 부재를 숨기기 위하여 죽어버린 실재를 증폭 부활시키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이란 다름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뮬라크르의 미혹 속’이라고 말한 보드리야르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지금 나는 대상에서 본질을 끄집어내는 첫 작업에서도 실패하는 미숙한 시인일 뿐이니까...
어쨌든 위의 글들은 여는 말이 길어졌다고 볼 수 있고, 주제가 내 시 속의 예술작품이니 이쯤에서는 나의 이 시를 주도하는 사상(?)의 원천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시의 제목에서 ‘천국’을 말하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 말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주 토요일 저녁, 아버지의 둥근 상 잎에 둘러 앉아 성경을 형제들과 돌아가며 읽으며 자란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신약의 첫째 책인 마태복음에서 몇 장 나가면 곧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라는 비밀한 메시지를 만난다. 이 메시지에서 ‘마음’과 ‘천국’이라는 말은 비밀의 화원처럼 늘 내게 신비스러운 영감을 주었었다. 자라면서 두 번의 전학과 이향(離鄕),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 결혼 후의 지난(至難)했던 삶은 더욱 깊이 나를 두 단어 안으로 이끌었다. 불행하게도 마음과 천국이 등식으로 성립되기까지는 오십 성상(星霜)이 흘렀다. 그만큼 세월을 낭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 뜻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그 의미의 거대함을 생각하면 태평양에서 물 한 모금 축인 것과 같다고 여기지만...
신약성경에서 천국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말에 천국이라고 번역된 말을 정확하게 구분하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있고, 천국(Kingdom of heaven)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과거부터 영원미래를 포함한다. 그러나 후자인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분으로서 오늘날과 다음에 오는 천년왕국시대에 '하늘에 속한 부분'에 해당된다. 내가 이러한 말들을 접한 것은 삼십 초반이었다. 나는 이러한 말들에 묘하게 매료되어 그토록 좋아하던 시집과 책들을 십년에 걸쳐 두 번이나 내다버렸다. 특히 인류가 포함된 우주의 수레바퀴 속에서 내게 실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거대한 의미망 속에서 ‘하늘에 속한 부분’이라는 영역이었다. 조숙하게도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운동장에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을 보며 생사의 의미에 집착하게 된 나는 그 답을 얻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게 된 셈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러한 글이나 시가 내게 오래 걸친 옷처럼 친숙한 이유는 오랜 세월, 이러한 세계를 추구한 까닭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하늘에 속한 부분과 땅에 속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한 싸움은 얼마나 처절했던지...
나도 축적된 내 사랑을 천국의 화폐쯤 되는 줄 알고
환원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등가(等價)가 아니어서
내가 집기도 전에 그들은 등을 돌렸다.
위의 시에서 이 구절들은 나의 이러한 행적을 압축한 것이다. 십 여 년 동안의 진리 추구와 실천 끝에 내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룬 줄 알고 덤벼 보면 대상은 아직도 커다란 산으로 나를 찍어 눌렀고, 나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면서 십년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 목련처럼 단지 흰 꽃으로 하늘과 땅을 일순간에 연결할 수는 없을까? 깊은 속의 방황으로 나는 시를 두 번 접었었다. 어느 날, 나는 깨닫는다, 앞 선 분들의 글과 행적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 속 깊은 곳이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아무 것도 붙잡는 것, 축적된 것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 그 곳에는 아무도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한다. 나의 누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가서의 이 노래를 같은 맥락에서 홀연 깨닫는다. 그러면서 받아쓰기처럼 시가 씌여졌다. 천국의 화폐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비워진 가난한 마음이다. 신의 지고한 사랑은 이것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일곱 단계로 낮아져 사람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고 목자가 어린양을 이끌듯이 부드럽게 이끈다. 이 땅에서 머리 기댈 곳도 자신을 묻을 땅도 갖지 않았고 유순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언덕에서 못 박혔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속옷까지도 제비뽑기 당했지만 자신을 저주하는 다른 강도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그런 후에 그는 공기 같은 영*이 되어 어디에나 존재한다. 가난한 마음은 이 신을, 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호흡함으로써... 어떤 연인이 나의 숨이 되어줄 수 있는가? 항상 사랑에 굶주린 나는 호흡처럼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줄 대상들을 의미를 찾아 떠돌았다. 그러나 홍수라도 끄지 못하는 불길 같은 사랑을 아가서에서 만났다. 그 책에서 신의 목적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불완전한 나와... 결혼이라는 단어 외에는 이 완전한 연합을 설명할 길이 없다. 쟝 보들리야르가 거부하는 이원론이나 시뮬라크르의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 오히려 하늘과 땅, 성과 속, 두 세계의 완전한 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화폐’라는 이 시는 사실 목련꽃을 빌어 일생을 들여 성경에서 배운 나의 사상을 쓴 셈이다. 성경을 예술작품이라고 했다 해서 불만이 있으신 독자는 마음을 넓혀주시길 바랄 뿐이다. 나로서는 이보다 더 심원한 예술작품을 아직은 만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헬라어로 프뉴마(Peunyuma). 숨, 공기의 뜻을 가지고 있음.
2011년 <문학과 창작> 가을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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