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교무실 밖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새로 돋아난 파란 잎을 한아름 안은 마로니에가 지나는 바람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한가롭게 교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이 비가 그치면, 세상은 눈이 부시게 푸르러 평소 당신이 좋아하는 초록과 노랑이 섞여 벌이는 연둣빛 파노라마가 펼쳐지겠지요.
비는 무슨 별난 이야기라도 내게 들려주려는 듯 바람을 업고 조용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예 지그시 눈을 감고 빗소리의 그 불규칙한 얘기들을 즐깁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고 미소 지을 당신을 떠올립니다. 결혼생활 이십 수년 동안 당신에게 보낸 편지는 이것이 네 번째가 됩니다. 당신은 어느 날 내가 보낸 편지들을 보여 주며 지난 날 무슨 별난 사연도 없으면서 꼭 비 오는 날만 가려서 편지를 썼다고 핀잔을 줬지요. 하지만 어쩝니까. 지금처럼 촉촉이 내리는 비는 까닭 없이 사람의 마음을 자꾸 감성 쪽으로 내몰거든요. 오늘도 창밖에 내리는 저 비가 내 마음 후미진 곳에 잠자던 상념의 단잠을 깨우고 갑니다.
어머님 위중하시다는 급한 전갈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저 정신 없이 허둥대는 내 앞에서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어머님의 눈을 감겨드리고 기도하는 당신 모습은 차라리 관세음보살의 화신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무슨 내세울 만한 능력도 없는 내가 그래도 제대로 된 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의 그 믿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떤 계기가 되어야 비로소 여태껏 보지 못하던 진실의 이면을 보게 되는가 봅니다.
비는 그치지 않고 아마 종일 내릴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제껏 함께 살아오면서도 장난으로 말고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사랑한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당신을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약할 때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의 그 사랑을 확인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이라면 구태여 말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내가, 또 당신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때껏 우리들의 생활이며 삶이었습니다. 해서 나는 억지로 분위기를 만들고 통속적인 드라마에서처럼 당신을 사랑한다고 입에 발린 그런 간지러운 말을 쉬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당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의 사랑보다 깊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한 인연이 남편과 아내라는 필연의 세월을 쌓기 시작할 때, 나는 그저 당신의 맑은 눈동자만 바라보아도 좋았지 사랑 운운할 만큼 이성(異性)에 세련되지 못 했습니다. 해가 가고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길들여진 후 사랑이란 말을 주고받을 만큼의 여유가 생길 때쯤, 하나 둘 아이들이 태어나 모든 관심을 뺏아가고 특히 둘째 셋째는 연년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그렇게 또 바쁘게 지냈습니다. 물론 그 동안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애틋한 나머지 꼬집고 할퀴어 세월의 두께만큼 무지러진 감정의 언저리가 사랑이란 말이 감히 발붙일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게 닳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젠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낌없이 말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믿음이 예전보다 허수해진 것도 아니고 내 삶의 방식이 갑자기 바뀌어 변덕을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금껏 쌓아온 우리들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무심히 흘러가는 이 세월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니 지난해부터 자주 들락거리는 병원에서 내 모든 용기와 자신감을 한꺼번에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혹시 오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생에 안타까운 후회를 남기지나 않을까 그것을 걱정하는 까닭입니다.
하고 싶은 말 차마 다 못하고 안타까움만을 안은채 구천을 떠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은 그 한마디, 기어이 당신 앞에 내려놓을까 합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 2003년 5월 봄비 내리는 어느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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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일기 (운영자 : 이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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