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문학평론가 이숭원 씨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사신을 공개하는 것은 큰 실례이지만 제 생애에 이만큼 감동적인 편지를 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공개를 해도 그분께 누가 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어 이 자리에 올립니다.)
이승하 형에게
전에도 여러 번 책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형에게 편지를 띄우는 일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읽으면 여러 곳에서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윤동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읽어보라고 권하며, 이 책을 읽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문학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문학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는 감별기의 하나로 이형의 책 『헌 책방에 얽힌 추억』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에 내신 산문집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에서도 이형의 가족사를 만났었고, 시집이나 소설집에서도 간접화된 형태로 접해왔던 것이지만, 이번 산문집 제2부에 들어 있는 글들은 이형의 어린 날을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게 합니다. 한 병약하고 섬세한 소년이, 보호받아야 할 가족에게서 가해지는 육체적·정신적 폭력에 의해 자아가 유린되고 파열되어, 문학의 꿈을 키워야 할 야윈 몸으로 가정을 등지고 떠돌이가 되는가 하면, 참으로 잔혹하게도 그 여린 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벌이게 하였으니, 그 가혹한 운명에 가슴이 메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한 가족사의 배경 속에서 이형이 소개한 누이나 어머니에 대한 시를 읽자니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몇 번이나 책을 접고 얼굴을 훔쳐야 했습니다. 이형의 시는 기교의 시도 아니고 정신의 시도 아니고 진정의 시입니다.
책표지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 심성이 천진하고 해맑아, 책만 한 보따리 안겨주면 아무런 투정 없이 몇 달이고 책에 빠져 지내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밤새도록 글을 쓰며 즐거워할, 이 법 없이는 살 수 있으나 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심약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책 보따리와 옷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낯설고 물 설은 서울역 한복판에 오두마니 섰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리게 조여드는 것 같습니다. 이형의 그 나이 때 나는 유도를 하고, 학원을 다니고, 학원에서 예쁜 여학생을 엿보며, 때로는 극장에 가 어두운 객석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를 탐하기도 하고, 시간 나면 취미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던 것이니, 이형의 참담한 시절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제2부의 글 중에서도 나를 가장 울리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글과 권태을 선생님에 대한 글입니다. 서문에 의하면 권태을 선생님에 대한 글은 몇 년 전에 출간한 산문집에도 들어 있던 것이라 하나, 어쩐 일인지 그때 읽은 인상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이번에는 아주 강렬한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가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친 지가 정확히 25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5년의 세월 동안 학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학생을 위해 성의를 다해 격려하고 조언하며 부모에게까지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경험은 단 한 건도 없거니와, 더욱 슬픈 것은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담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생님께서 고난과 역경을 뚫고 모교의 교수가 된, 저 옛날의 병약하고 외로운 학생을 초청 문인으로 그분이 재직하는 대학 강단에 세웠을 때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전공이 무엇이고 어떠한 업적을 내신 분인지는 모르지만, 이형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유일한 사람이 될 긍지로 노력해주기 바란다"는 엄청난 말로 좌절에 빠진 소년을 격려·고무하였으니 그 성심과 진정에 감동할 따름이며, 그 성심과 진정으로 그분은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일급 문사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분 못지 않게 훌륭한 사람은 이형의 부인입니다. 그분은,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온, 만성 불면증에 말 더듬는 버릇이 있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힘없는 시에만 몰입해 가는, 첫사랑 실패 경험도 있는, 이 상처 많고 심약한 젊은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남편으로 섬기고자(그야말로 섬기고자!) 마음먹었으니, 이 황잡한 시대에 그런 여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친정의 반대와 싸워가며, 결혼 후에도 친정의 불평과 싸워가며, 가정경제의 궁핍과 싸워가며, 어린애의 병과 싸우고 남편의 병, 자신의 병과 싸우며, 몇 차례의 대학 쪽 취업 낙방으로 실의에 잠겼을 섬약한 남편을 위무하고 북돋우어 주었을 그 부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이형이 모교의 교수가 된 것은 8할이 부인의 공입니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에서 잠깐 인사했던, 목 뒤 어딘가에 반점이 보이던, 그 평범해 보이던 부인이 바로 이형을 오늘에 있게 한 히딩크임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형과 이동하 형은 모계의 인문학적 감수성과 우수한 지능을 물려받았습니다. 두 사람 다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인 책벌레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아들의 지능은 99% 모계에서 오고, 딸의 지능은 모계와 부계가 섞여 온다고 유전학자들은 말합니다. 어머님의 미발표 회고록 제목이 '설원을 걸어온 나의 발자국'이라니 이 얼마나 문학적입니까?
이형을 문학인으로 키운 것은 모계의 문학성과 부계의 신경증입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오늘의 이형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경찰서장이 된 부친과 초등학교 교감이 된 모친 슬하에서 평탄하고 화목하게 성장했다면 동하 형은 정직한 법관이, 이형은 성실한 인문학 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형이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인연에 의해 이형은 시인이 되고 문예창작과 교수가 된 것입니다. 오늘의 자리에 만족한다면 그 공의 반은 부친에게도 있는 것이지요. 싯다르타가 성불한 후 자기를 괴롭혀온 제바달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성불할 수 있었던 것은 세세생생 제바달다가 나를 괴롭힘으로써 인욕바라밀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내가 성불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제바달다도 다음 세상에 성불하리라.
권태을 선생님 말씀대로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형의 또 한 차례의 도약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이형을 천형처럼 얽매고 있는 가족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도 도약의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훌훌 떨치고 새처럼 훨훨 날아가십시오.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오후 10시 39분
한국의 월드컵 패전보를 들으며
이 숭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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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일기 (운영자 : 이혜우)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
▷삶을 위한 에세이
▷시의 길을 가는 젊은이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