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짙은 앞동산 솔향기가 풍겨오는 신록
달빛을 타고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기
곱게 물든 단풍의 은행을 털어(?) 구워 먹는 낭만의 맛
신선한 공기와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자연과 함께 하는
여기의 직장생활이 참 좋아요.
극장과 나이트클럽도 없는 산골이지만
흙 냄새나는 내 고향에 온 느낌입니다.
다가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섣달 깊은 밤
당신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찾아
그리움의 날개를 폅니다.
아이들 학원비라도 보탬을 주겠노라 아르바이트하며
밤늦게 들어와 살림을 챙기고 자리에 누운 당신은
꿈도 꾸지 않는 단잠에 빠져 있나요.
여보, 요즘 독감으로 고생이 많다는데
인천의 우리 가족들은 어떤가요.
외출 후 위생관리 철저히 하고 침실에 가습기 틀어 주도록 하세요.
허약한 당신이 늘 걱정되는데
힘든 일은 미루어 두면 주말에 제가 가서 도우리다.
IMF 사태로 장기 근속하던 안정된 직장에서 밀려나
몇 곳을 옮기며 혹독한 시련을 겪고
이제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경험을 살려 인정받기 위해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경기도 포천
저는 타고난 사교적 기질로
직원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 잘 적응하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세요.
식사도 끼니 거르지 않고 챙겨 먹고 있습니다.
직장의 기숙사가 한편 편할 줄 알았는데
결혼 후 떨어져 살지 않았던 우리가 뒤늦게 주말 부부가 되어 지내려니
외롭고 서글퍼 숙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헤어져 있으려니 당신과 가족의 소중함과 화목이 새삼 간절히 느껴지고
제가 보고 싶어 당신이 울었다는 딸의 전화에
저는 뜨거운 감격으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이곳은 농촌 지역이라 주로 노인 환자들이 많은데
선친을 병으로 일찍 여읜 막내가 내 부모같이 돌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사명감 때문에 지금까지 한 눈 팔지 않고
한 우물 파오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숙소와 사무실 정리 정돈하고
지금은 쌓인 습작들을 정리하는 워드 작업으로 여가를 보내고 있답니다.
독서를 하며 마음의 밭도 일구어 나가고요.
하늘의 인연으로 여겨 아무 조건 없이 맨손으로 결혼하여 낯선 객지
단칸방에서 시작한 우리의 신혼
그러나 어려운 생활 가운데 알뜰히 내조하여
남부러운 가정을 이루었으니 모두가 당신의 공로입니다.
주위의 도움은커녕 소외된 이웃에게 베푸는 보람으로 살다보니
오히려 우리의 가정이 풍요해지고
자녀들도 곱게 자라나고 있으니 축복이지요.
이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면
우리의 장래는 날로 향기로워 질 것입니다.
여보, 우리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요
연애시절처럼 살다보면 언젠가 우리 가족은 다시 만나
정원에 화초를 가꾸며 노천명님의 시처럼 여왕보다 더 행복하다고
노래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 가족의 힘찬 응원을 받는 가장은
보람찬 내일을 기원하며 안식을 취하렵니다.
여보,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2002년 12월 20일 금요일
포천에서 못난 남편 보냄.
|
|
편지, 일기 (운영자 : 이혜우)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
▷삶을 위한 에세이
▷시의 길을 가는 젊은이에게
[이전 10개] [1]..[121][122][123][124][125][126][127][128] 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