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자연의 아들이었고 고향에는 부모 친척은 물론이고 고향 산천도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화하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문명의 아들로 크다보니 산천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발전인지 오그라듦인지 몰라요.
지난날엔 국토와 국민을 함께 생각했는데 이제 국토는 안중에 없고 국민만 보는 역사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국토를 함부로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전우익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 옵니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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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량사(33 X 24.5cm). |
청량리행 열차로 봉화 가는 길. 잊고 지내던 풍경의 상채기가 삼곡에서 단양에 이를 즈음 기억의 통증으로 되살아난다. 산허리가 완전히 잘려나가 허옇게 뼈를 드러낸 무참한 형해(形骸). 연이어 즐비한 시멘트 공장과 포크레인. 인간이 무슨 권리로 저리도 포악한 짓을 지속할 수 있는지. 하긴 내 집을 지을 때도 레미콘을 썼으니 누가 누구를 탓하랴마는.
아쉽기로는 문명에 갇힌 도담삼봉(嶋潭三峯)의 풍광도 이제는 옛 그림에서나 정취를 찾아야 할 것 같아 차창에서 눈을 뗀다. 그리고 다시 매만지는 쪽빛책 표지에 선명한 늙은 농부의 흑백사진.
전우익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도 차편이 여의치 않아 그만 장례에 참석치 못했는데, 고인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아 이튿날 아침 생가(生家)로 찾아가는 길이다. 영주역에 내려 봉화 상운면 구천리로 가는 도중 택시에서 눈을 감자 고인이 된 선생과의 인연이 떠오른다.
10여 년 전부터 숲과 문화의 회원으로 가끔씩 숲에서 뵈었고, 한 출판사의 같은 필자로서, 그림 감상자로 전화를 주시던 일. 걸망을 지고 내 작업실을 다녀가신 일. 그리고 3년 전 봉화 춘양목 축제 때 전영우 박사(국민대)와 함께 생가를 찾았던 일이 스쳐간다. 생전 모습의 마지막이 된 그 날은 몹시도 무더웠는데 한옥 마루에서 수박을 깨 함께 나누었었다.
무슨 일이든 이념이나 생각보다 노동과 실천을 참 가치로 여기며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선생의 체취는 굵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험한 세상굴레에 갇혀 살았다. 그 내성이 농사꾼으로서 편지를 쓰게 하고 버려진 나무를 깎고 쪼고 다듬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거듭하게 했을까.
그 날 주신 선물은 평소 즐겨 읽으신다는 <철학의 즐거움>의 저자 민병산(閔丙山)이 쓴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항시 좋아라’는 뜻의 ‘우기청호(雨奇晴好)'를 복사해 주셨는데 일상은 물론 연하장으로도 좋을 것 같다. 또 함께 주신 목리(木理)가 선명하고 단단한 춘양목(소나무)의 밑동을 켜낸 작은 통나무는 여전히 지금도 화실에서 송진향을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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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원 선생과 뒤실마을의 정도윤-김민영 부부. |
산골 상가(喪家)엔 삼오제 준비로 아직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이 때늦은 참배객을 맞아 주었다. 병원 영안실에서 모셔온 영정 사진이 유명을 달리했던 선생의 방에 되돌아와 있어 생전의 모습이 뭉클하다.
향을 사르고 방을 살피자 고인이 즐겼던 작은 그림과 글씨, 낡은 청색모자가 주인을 잃고 벽에 걸려있다. 안채 창고엔 평소 선생이 매만지던 온갖 공구와 목공예 재료들이 뒹굴고, 나무액틀로 걸어놓은 글씨도 여전하건만 어째 스산하기만 하다. 대문 밖엔 선생이 손수 심은 나무들이 영혼을 위무하듯 합송하며 도열하고 섰는데, 그 마당 한 켠으로 터진 나무토막에 꽂혀 있는 도끼 한 자루!
무수한 시간, 날을 세워 나무를 팬 일이 어찌 흐르는 땀방울뿐이었으랴. 갇힌 사람의 울분이 도끼질로 쪼개지고, 때론 용출하기도 했으며, 성찰의 담금질로 새겨져야 했음을….
선생의 생가를 기념해 두려고 손자 민현(23)과 함께 앞산에 올라 화첩을 펼쳤다.
“너희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니?”
“네, 우리 할배는 한 마디로 참 매력있는 분이심더.”
“무슨 매력?”
“그것은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심더. 할배와 여기서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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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윗뒤실마을 풍정. |
어쩌다 뵙거나 전화통화로 건강을 염려하면 선생은 되레 “쪼께만 기다리소. 이제 다 돼 갑니다” 하며 너스레로 받던 선생. 그의 삶은 작금의 세태에 안다리 걸던 의지도 그새 무상함을 간파한 것일까. 세상을 질타하던 노인은 무릇 흔적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고파 평소 유언대로 유골을 뒷산 바람 속에 뿌려 주었단다.
선생의 말벗이자 책에 자주 등장하는 손녀 언년이(김평화?21)는 처녀가 되었고, 자라며 할배의 영향이 컸었는지 나무와 숲을 기리는 산림자원학과(영남대)에 들어갔다. 하여 고인의 사랑으로 자란 언년이를 마저 그리고나서야 마당을 나섰다. 그런데 택시기사(차진수)는 여태까지 길손을 기다리며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와서 이웃을 도와 준다고 오늘은 기름값만 받고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좋아요, 그렇다면 이 길로 늦기 전에 청량산으로 갑시다.”
청량산(淸凉山). 꼭 10년 전 사찰기행으로 청량사(淸凉寺)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수려한 산세의 연꽃자락 화심(花心)에 둥지를 튼 절은 깊은 인상으로 남았는데, 세 사람이 빗속의 산길을 올라 화첩을 펼쳤었다. 그 그림일기(<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청량사 편)를 꺼내 보니 옛 인연이 다시 새롭다.
특히 그 옛날 단원 김홍도께서 청량취소도(淸凉吹蕭圖)를 그리며 산에 올라 젓대를 불고 시를 쓴 내용이 밝혀져 더욱 감회로웠으니….
구름 병풍 안개 휘장이 한 폭 한 폭 드러나니
누구의 솜씨인가 아득히 망망한 열두 폭 그림
-홍도 ‘청량연영첩’
하지만 그 동안 가람배치가 완전히 새롭게 짜였고 산사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절의 변모가 일신되었다하여 꼭 다시 찾고 싶은 터였다.
주지하다시피 청량산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민왕이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조선 초의 성리학자 주세붕과 이퇴계 등이 머물던 곳(오산당)으로 서른여섯 봉우리에 스물네 개의 절이 조선조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봉우리는 연화봉, 보살봉, 의상봉으로 불리다가 주세붕에 의해 새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 새 잘 닦인 포장도로에서 택시 기사와 헤어진 후 산을 오르자 날이 저물어 온다. 다급히 금탑봉의 응진전으로 올라 위태한 벼랑에서 다시 보는 병풍 같은 암봉, 그리고 가람의 새 얼굴. 어느새 감회에 휩싸여 어스름이 몰려오기까지 화첩을 펼친 후 유리보전(琉璃寶殿)으로 내려와 주불인 약사여래님께 향을 사르고 합장한다. 조금 전 전우익 선생의 상가를 다녀온지라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이어 주지 지현(智玄) 스님을 뵈오니 따뜻하고 넉넉한 눈빛이시다. 십수 년간의 불사를 이끌어왔고, “최고의 악조건에서 최대의 공연”이었다는 산사음악회 또한 스님의 발상과 의지로 치러냈다. 한편 수행자의 뼈저린 고독은 산중생활을 스스로 밝힌 글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진솔하다.
봉화의 청량산 자락은 겨울이면 유난히 황량하다. 잎이 다 져버린 나무 사이로 바람은 쉴새없이 포효하며 넘나들고, 내리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는 나뭇가지의 울음소리가 밤새 계곡을 울린다. 이런 밤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차 한 잔 끓여 앞에 두고 그 모든 소리에 귀를 모두며 하얗게 밤을 밝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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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치밥(33 X 24.5cm). |
-지현 스님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에서
산사에 머문 나그네 겨울밤도 무엇이 그토록 허허로운지 밤새 별밭을 헤아리고, 어떤 참회로 차디찬 법당 마루에 머리를 연신 조아려야만 했었는지.
이튿날 아침, 스님과 차를 나누며 어젯밤 청량산 주변 마을을 부탁한 것에 대해 되묻자, 스님은 그렇잖아도 연락을 해 두었다며 오후에 함께 산을 내려가자신다. 따라서 오전내 청량산 청량사 전경을 그리기 위한 부분도와 전도의 이미지를 마저 화첩에 옮기고나서야 배낭을 꾸렸다.
스님은 마을 길목과 하천을 가르키며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청량산 마을은 아주 각별한 풍속이 있었지요. 소위 공민왕 사당으로 여러 산마을에서 각기 신당을 모신 이들이 깃발을 나부끼며 모여드는 모습은 참으로 장엄하고도 장관이었습니다. 이 산마을의 아름다운 풍속과 대동(大同)을 위해서도 다시 살려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라고 하신다. 순간, 일전 영암의 왕인축제 중 제작했던 ‘왕인박사 일본 가오’ 행렬도가 떠올랐다. 이제는 거의 영암 문화축제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행사는 마을 주민의 긍지요, 관광자원으로 널리 선양되고 있기에 말이다.
“오늘 만나는 젊은 부부는 고향으로 귀농한 사람들인데 아주 성실하고 심지가 굳지요. 아마도 이 선생께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차는 명호면 북곡리 1323번지 정도윤(32)-김민영(29) 부부의 집에 닿았고, 정씨의 조부 정세원(鄭世元?85) 선생이 계서서 큰절을 올렸다. 북곡리 아래뒤실에서 났다는 정씨는 오남매 중 막내인데 대구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귀향했다. 부인 역시 대구에서 대학을 마친 후(국사 전공) 남편을 따라 귀농했는데, 두 아들을 낳고 할배를 모시고 산다.
생활은 감자 농사, 농산물판매에다 민박을 치고 마을지킴이를 자청해 골프장 반대, 마을도서관 유치 등을 위해 일한다고 한다. 도심 물이든 사람이 귀농하여 자연의 자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살겠노라는 결심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읜 탓에 할배의 영향이 무엇보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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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윗뒤실 마을의 박기락씨(왼쪽), 윗뒤실 마을의 김진태씨. |
할배는 예전 3년간 청량산 김생굴에서 일봉선사(一峰禪師)에게 글을 배운 후 많은 시와 비문을 짓고 지관(地官)으로도 불려 다녔다. 또 의서를 읽고 약을 지어 사람들에게 베풀어 왔으며, 몇 해 전 퇴계 선생의 제사 때엔 할배가 축문을 짓고 직접 읽으셨다고 한다. 한편 할배가 조합장을 지내실 땐 집살림이 줄어든 경우로, 이웃을 위해 헌신한 우리 시대의 선비라고 정씨는 할배를 존숭한다.
그 할배의 정신을 이제 손자가 잇고자 새집을 짓고 흙내음 속에서 큰 아들 동욱(5)을 분곡분교에 보낸다. 하지만 곧 폐교가 될 처지여서 이 학교를 마을 도서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또래의 젊은이와 선배들을 찾아 뜻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이제 나의 청으로 청량산이 한껏 드러난 마을을 찾아 떠나니 윗뒤실 마을 가는 길은 그야말로 꼬부랑, 아리랑 산길이다. 살뜰한 그의 아내도 윗마을은 처음이라며 나들이겸 함께 차에 오른다. 그런데 강파른 외길을 노인들은 아직도 걸어서 오가고 객지로 나간 젊은 자식들은 차로 다닌다. 이런 탓에 노인들은 멀리도 말고 아랫뒤실 마을로 살림을 나는 것이 큰 소망이기도 하단다.
이름 그대로 ‘뒤실(북곡리)’은 청량산의 뒷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인데, 공민왕 신이 청량산에 있고, 반대쪽의 문명산은 공민왕 부인신이 있어 서로 합궁하는 터전 속의 마을이란다. 그런데 이런 산신들이 지켜주는 마을이 왜 이리도 피폐하고 가난한가. 관음봉이 넘겨다보이는 장엄한 산세 아래 경사진 겨울 들판은 차마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람한 암봉이 겹겹 출렁이며 솟은 산 아래 비탈에서 씨 뿌리고 땀 흘렸을 촌부들은 이제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 되고 있다. 한때 60호에 이르던 마을은 12호로 줄었고, 고냉지 농사는 인건비가 나오지 않아 때론 밭을 묵힌다는 것이다.
한편 산짐승들의 출현이 빈번하고 염소는 방사해 두어도 탈이 없다고 말하는 박기락씨(70). 홀로 공민왕 부인 산신각을 모시고 산다는 김진태(78)를 만난 후 마을 길목의 거대한 느티나무 앞에 이르니 일몰이 잦아든다.
마저 산과 마을 전경을 살피러 올라간 반대편 언덕 위, 감나무 두 그루는 이제 까치밥이 되어 창공에 떠 있다. 어쩐지 쓸쓸하고 쇠락한 노을 속 풍광의 산마을을 화첩에 담고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길. 오늘날 자연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길은 이리도 험난하고 고달픈가 싶어 괜시리 우울하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은 정씨 아내가 근무한다는 청량산 박물관에 와서 마을의 역사와 내일의 비전을 발견하게 했다. 젊은 학예연구원(정민호) 역시 뜻있는 청년들과 고향의 문화를 위해 귀향근무를 자처한 이로, 박물관 내실의 산파역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음에랴.
그리하여 마침내는 정씨 부인이 차려낸 밥상에서 저녁을 함께 나누며 다시 자연인으로 살기위한 젊은 의지의 눈빛과 살가운 애정을 느끼는 순간, 새로운 ‘상록수’를 떠올렸다.
“제발 운동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삶을 위한 의지로, 봉사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면 좋겠어요. 그래서 훗날의 마을이 진정으로 기대돼요.”
언젠가의 뜨거운 해후를 기대하며 신뢰 속에 살아가는 일 또한 아름다운 그리움이 아닌가.
작가 프로필
필자 이호신(李鎬信)씨는 1957년 경북 평해 태생으로,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아홉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주로 문화, 자연유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그림과 글로 이웃에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을 위한 상생의 본질을 찾는 그림 기행을 하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은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길에서 쓴 그림 일기>(현암사), <숲을 그리는 마음>(학고재), <달이 솟는 산마을-영암>(현암사), <풍경 소리에 귀를 씻고>(해들누리), 공저로 <동강 12경>(수문출판사), <새천년에 부르는 석굴암 관세음>(연기사) 등의 저서가 있다.
/그림·글 이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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